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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사] 

베트남의 전기만록
권혁선  (2015년 09월 05일 19시56분29초)  


【『금오신화』에 비견되는 16세기 베트남 고전소설의 걸작】

이 책은 16세기 전반에 베트남의 문인 완서(阮嶼)가 창작한 『전기만록』(傳奇漫錄)을 번역한 단편소설집이다. 『전기만록』은 한문으로 씌어진 전기소설(傳奇小說)로서 전 4권, 각 권 5편씩 모두 20편의 작품이 실려 있다. 14세기 중국의 구우(瞿佑)가 지은 『전등신화』(剪燈新話)에 영향받아 씌어진 이 책은, 15세기 김시습(金時習)이 창작한 『금오신화』(金鰲新話)에 비견되는 베트남 고전소설의 걸작으로 평가된다.
요괴의 유혹, 남녀간의 사랑과 이별, 천상 혹은 지옥 등의 별계 방문담, 동물의 변신 등 시공간을 넘나들며 펼쳐지는 기이하고 환상적인 이야기 속에는 베트남 민족의 드높은 자주성과 현실비판 의식, 전통문화와 풍속 등이 담겨 있어 베트남의 고전문학뿐 아니라 고유 문화와 역사를 이해하는 데 단초를 마련해 준다.
 
【『전기만록』에 담긴 핵심적 메시지】
  -- 왕위 찬탈과 현실사회에 대한 비판, 중국의 침략전쟁 반대

전기소설은 동아시아 중세에 성립하여 발전해 온 소설 양식이다. 시와 산문을 독특하게 교직(交織)하면서 남녀의 사랑이나 기이한 사건을 흥미롭게 펼쳐 보이며, 환상적인 내용 속에 현실에 대한 작가의 감정과 태도를 가탁(假託)하기도 한다. 『전기만록』의 저자 완서 역시 다양한 주제와 소재를 활용한 옛이야기 속에 권선징악, 인과응보, 음사(陰祀)에 대한 비판 등 중세시대의 보편적 세계관을 담고 있다.
 완서가 『전기만록』을 통해 투영하고자 한 핵심적 메시지는 왕위 찬탈과 부패한 현실사회에 대한 풍자와 비판이다. 이 책의 배경은 베트남의 진조(陳朝, 1225∼1400) 말, 호조(胡朝, 1400∼1407), 여조(黎朝, 1428∼1788) 초 연간으로, 저자 완서가 생존해 있던 시대보다 1, 2세기 앞선다. 1527년 여조의 신하 막등용(莫登用)이 왕위를 찬탈한 사건이 있은 후 완서는 진조의 신하로 왕위를 찬탈한 호조에 빗대어 현실 속의 막씨 정권을 우의(寓意)적으로 비판하였으며(「기이한 나무꾼」·「변신」·「항우의 변명」 참조), 무능하고 부정한 위정자들에 대해서도 신랄한 비판을 가하였다(「천상 구경」·「이장군」 참조).
 이 책의 핵심적 메시지 중 또 다른 하나는 중국의 침략주의에 대한 반대와 비판이다. 반전(反戰)을 주장하는 『전등신화』나 스토리텔링의 한 장치로만 병란을 이용하는 『금오신화』와는 달리, 『전기만록』에서는 중국[明]의 침략전쟁으로 인한 베트남 인민의 참상을 강조하면서 침략전쟁 반대와 저항적 민족주의의 면모를 강하게 띠고 있다(「열녀 예경」·「두 신령의 다툼」·「죽음보다 깊은 사랑」·「야차들의 장수가 된 사나이」 참조).

【소설적 재미와 함께 문화적 동질성 확인】
 
『베트남의 기이한 옛이야기』는 작품에 내포된 우의와 상관없이 이야기 자체만으로도 매우 흥미로운 소설이다. 불교와 도교를 바탕으로 기이하고 신비롭게 펼쳐지는 작품의 줄거리를 따라가다 보면 독자들은 소설적 재미에 푹 빠져들게 된다. 우리와 직접적 교류가 없는 저 먼 남쪽나라 베트남의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베트남의 사람 사는 방식과 사람이 느끼는 애환과 희비가 비슷함에 새삼 놀라게 된다. 특히 저자의 유교적 세계관이 반영된 각 작품 말미의 평어(評語)를 통해서는 같은 유교 문화권으로서의 동질성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이는 중국의 변방으로서 유사한 역사와 문화적 영향을 받은 한국과 베트남, 양국의 비슷한 처지에서 오는 공감과도 같은 것이다.


【역자 박희병  ― 동아시아 비교문학 연구의 새로운 성과】

'정치(精緻)함과 정연(整然)함의 미덕을 갖춘 학자'로 평가받는 이 책의 역자 박희병(朴熙秉) 교수는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문학과 및 동대학원을 졸업하였고, 경성대학교 한문학과 교수와 성균관대학교 한문교육과 교수를 거쳐 현재 서울대학교 국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한국전기소설의 미학』(돌베개, 1997)으로 1998년 제3회 성산학술상을 수상했으며 『한국의 생태사상』(돌베개, 1999)으로 제40회 한국백상출판문화상 인문과학 부문 저작상을 수상하였다. 그밖의 저서로는 『한국 고전인물전 연구』(한길사), 『선인들의 공부법』(창작과비평사) 등이 있으며, 『나의 아버지 박지원』(돌베개)을 비롯한 역서와 논문 다수가 있다.

<섬세하고 깔끔한 번역, 정밀한 주석작업>
동아시아 비교문학에 대한 연구를 끊임없이 진행해 온 역자는 섬세하고 깔끔한 번역, 적확한 어휘 사용으로 베트남의 ‘전기소설’이라는 다소 이국적이고 생소한 주제를 친근감 있는 고전문학의 한 유형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특히 정갈하면서도 유려한 번역문은 독자들의 감정이입을 더욱 증폭시켜 소설과 신화 읽기의 재미를 한 차원 높여 주고 있으며, 베트남의 지리·역사·풍속에 대한 정밀하면서도 친절한 주석은 베트남의 역사와 고전문학에 대한 다양한 지식을 전해준다.
또한 이 책에는 베트남의 정치 정세 및 도시를 파악할 수 있는 지도와 주요 연표가 참고 자료로 제시돼 있다. 베트남의 주요 지역뿐 아니라 본문 속에 등장하는 고지명(古地名)을 새롭게 찾아 표시해 놓은 이 지도들은, 각각의 작품이 베트남의 실제 공간을 바탕으로 그 지역의 역사와 문화·풍속을 고스란히 담고 있음을 입증하는 동시에 이 책에 대한 독자들의 이해를 심화시켜 준다.
 
<중국 혹은 자국 중심의 시각에서 벗어난 평등한 관점>
『베트남의 기이한 옛이야기』에는 역자의 논문 「한국·중국·베트남 傳奇小說의 미적 특질 비교」가 부록으로 실려 있다. 『금오신화』·『전등신화』·『전기만록』 등 세 나라의 대표적 전기소설의 미적 보편성과 특수성을 우의·결말구조·시공간·인물이라는 네 측면에서 비교 검토한 이 논문은, 민족의 차이와 작가의 문제의식의 차이가 각 작품에 어떻게 투사되면서 작품의 미적 특질의 차이를 초래하는지 자세히 해명해 준다. 특히 이 논문은 세 나라 전기소설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자기중심성을 벗어난 ‘평등안’(平等眼)을 통해 비교 분석하고 있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중국 중심 혹은 자국 중심의 비교 우위적 시각에서 벗어나 평등한 관점으로 각 나라의 작품을 살펴본 역자의 이러한 시도는 이후 활발하게 진행될 동아시아 문학의 비교 연구에 새로운 작업 모델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