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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자료] 

도요다 사키치와 도요타 강령
권혁선  (2015년 08월 31일 00시29분36초)  


도요타-존경받는 국민기업이 되는 길

도요다 사키치와 도요타 강령


도요타그룹의 창시자 도요다 사키치

도요타그룹의 창시자 도요다 사키치

도요타는 창업자인 기이치로의 부친인 도요다 사키치(, 867~1930, 이하 사키치)가 원조라고 할 수 있다. 가난한 시골 농가에서 태어나 초등학교밖에 졸업하지 못했지만, 사키치는 어릴 때부터 '발명이 국가를 위한 길이라면 아무도 생각해 내지 못하는 발명을 해 보이겠다'라는 야망을 가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재산도 없는 젊은이가 무에서 유를 만들어 낼 수 있는 방법은 범죄와 도박을 제외하면 발명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키치가 태어난 하마나코()
1) 주변 농촌지역 사람들은 겨울 농한기 때에는 손으로 목면을 짜는 부업에 매달렸다. 당시에는 직기를 발로 밟아 목면을 짜야 했으므로 생산성이 아주 낮았다. 이를 본 사키치가 "일본인이 가장 많이 소비하는 물자는 옷(면포)이다. 면포 생산의 효율을 높여 싸게 공급할 수 있으면 이는 곧 국가를 위한 길이다. 발로 동력을 전달하는 지금의 직기는 너무 원시적이다. 이를 개량하면 빨리 면포를 짤 수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자동직기를 발명했다.

그는 "농업으로 한 가구를 지탱하기 위해서는 1정보()
2)의 토지가 필요하다. 그러나 1정보의 토지에 공업을 일으키면 한 마을을 먹여 살릴 수가 있다. 국토가 좁은 일본은 공업을 일으켜야 살아갈 수 있다. 이를 위해 나는 자동직기를 발명하기로 했다"라고 했다. 사키치는 당시 일본의 시대 상황과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정학하게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를 스스로 발명으로 실천해 보였다.

23세 때인 1890년에 처음으로 목제 자동직기를 발명하고, 이후 개량과 개선을 거듭하여 최종적으로는 1924년에 'G형 자동직기'를 발명했다. 1926년에는 G형 자동직기를 제조하기 위해 아직도 존속하는 '도요타자동직기제작소'를 설립했다. 그리고 1929년에는 영국의 '플랫'사에게 특허권을 양도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이러한 것을 보면 사키치의 자동직기가 당시에 어느 정도로 영향력이 큰 발명품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아무튼 도요타의 원조는 사키치의 자동직기의 발명부터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도요다 사키치가 발명한 G형 자동직기

도요다 사키치가 발명한 G형 자동직기

사키치는 단순히 자동직기를 발명하고 재정 기반을 다져 결과적으로 자동차 사업을 하는 터전을 만드는 데 그치지 않았다. 그는 이후 도요타의 기업문화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지금도 도요타의 홈페이지에는 기본 이념 바로 밑에 '도요타 강령()'이 별도로 있다. 이 강령에는 '도요타 경영의 핵심이며 기본 이념의 기초'라는 해설이 달려 있다.

이는 사키치 사거() 5주기()인 1935년에 장남 기이치로를 중심으로 사키치의 기업 이념 혹은 인생철학을 정리했던 내용이다. 이 강령은 도요타가 곤경에 처하거나 새로운 도전에 직면할 때 반드시 되새기는 경영방침과도 같은 것이다. 일본의 초등학교 도덕 교과서에도 실릴 정도로 내용이 실질적이며 박력이 있다.

‒ 도요타의 모든 사람들은 업무에 성실하게 임하여 국가나 사회에 공헌하는 실적을 남겨라.
‒ 연구와 창조의 정신을 잊지 말고 시대의 선두에 서라.
‒ 사치를 경계하고 질실강건(質實剛健)하여라.
‒ 주위 사람에 대해 우애의 정신을 가지며 가정적인 팀워크를 구축하라.
‒ 신불(神佛)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생활 속에서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라.

아직도 도요타의 기업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강령에서 읽을 수 있는 키워드는 첫째, 국가에 기여하는 기업, 둘째, 항상 도전하고 창조하는 기업, 셋째, 낭비가 없는 기업, 넷째, 화()를 중시하는 기업, 다섯째, 사회에 감사하는 기업으로 정리할 수 있다. 지금까지의 도요타의 경영사를 보면 강령의 정신이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일본 최초로 자체 승용차 엔진을 개발하는 과정을 보면 국가에 대한 기여정신과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창조정신이 그 원동력이었다.

TPS 개발은 낭비를 최대한으로 없애기 위한 생산 시스템을 구축하는 과정에서 얻어진 결과였다. 또 노사화합이나 종신고용을 고집하는 것도, 사회공헌의 가치를 중시하는 것도 강령에 나타나 있는 이념이다. 이러한 강령은 어느 기업에도 있을 법한 내용이지만, 놀라운 것은 도요타가 이 강령의 정신을 시대에 맞게 재해석하고 또 실천하고 있다는 점이다.

도요타 강령 중에서 국가나 사회에 기여해야 한다는 것이 제일 먼저 나오는 것도 특징적이다. 그렇다고 도요타가 다른 기업보다 유별나게 사회공헌을 위해 힘쓰는 기업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인들이 도요타에 대해 애착을 갖고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항상 도요타가 국가의 이익과 기업의 이익을 일치시키도록 노력해 왔기 때문이다.

이런 에피소드가 있다. 제1차 석유위기가 발생했던 1970년대 전반, 일본에서는 물가상승, 고도성장의 반동 등으로 대기업에 대한 비판이 비등했다. 당시 도요타가 대기업의 상징으로서 국민들로부터 거센 비난을 받자 당시 사장이었던 에이지가 "도요타는 돈을 벌기 위해 사업을 하는 것이 아니다. 도요타는 일본의 산업 진흥에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를 항상 고민하고 있다.

도요타가 생각하고 있는 사회공헌이란 국가를 위해 많은 이익을 내고 세금을 납부하는 것이다"라는 반론으로 비판을 잠재웠다고 한다. 이러한 반론은 어느 기업의 경영자라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도요타의 경영자가 이런 말을 했기 때문에 일본 국민들은 이 말을 믿었던 것이다. 그만큼 도요타는 일본 국민들로부터 신뢰를 받고 있다.

또 한국의 모 그룹 회장이 제8대 사장이며 당시 회장이었던 오쿠다에게 장기 번영의 비결을 묻자, 오쿠다는 "기업의 사회적 사명은 사회공헌을 하는 것이다. 국익과 기업의 목적을 일치시키면 반드시 그 기업은 발전한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오쿠다 회장에게도 국가와 기업에 공헌해야 한다는 도요타의 강령이 강하게 스며들어 있기 때문에 이러한 대답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사키치가 도요타의 기업문화 형성에 미친 영향은 실로 막대한 것이다.

도요타는 종신고용을 지키는 기업으로도 유명하다. 강령의 네번째에 있는 도요타 특유의 대가족주의 정신이 있기 때문이다. 사키치는 평소에도 종업원을 가족처럼 여겨 왔다고 한다. 항상 이를 옆에서 보아 온 기이치로는 G형 자동직기의 특허권을 영국의 플랫사에 양도하고 들어온 일시금 25만 엔 중 10만 엔을 직접 개발에 종사한 관계자에게 나눠 주고, 나머지 15만 엔도 도요타의 전 종업원 6,000명에게 특별 공로금 명목으로 지불했다고 한다.

종업원들에게는 1개월 월급에 가까운 금액이었다. 당시 도요타자동직기가 창업하여 3년 동안 벌어들인 이익이 25만 엔이었다. 25만 엔은 막 자동차 사업을 시작하려는 기이치로에게는 정말 필요한 자금이었을 수도 있다. 당시 도요타가 특별 공로금을 지급한 사실은 모든 신문에서 취급했고 이 때문에 종업원들의 사기는 극에 달했다.

이로 인해 자동직기의 경영이 호전되어 자동차 사업을 위한 기반도 정비됐다. 이때 기이치로는 "종업원은 회사의 보물이다"라고 말했다. 또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에는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던 도요타그룹의 직원이 일본의 공장으로 모여들자 도요타는 이들의 생계를 위해 미꾸라지 양식과 같이 별의별 사업을 다했다고 한다.

기이치로의 장남인 도요다 쇼이치로(, 이하 쇼이치로)는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어묵공장의 기계화를 위해 북해도 최북단인 와카나이()까지 파견될 정도였다. 이처럼 도요타에는 초창기부터 종업원을 가족처럼 여기는 기업문화가 있었고 경영자 특히 오너경영자들은 종업원들을 중히 여겼던 것으로 보인다.

1949년의 일본경제는 닷지라인
3)이라고 불리는 초긴축정책의 영향으로 심각한 불황을 맞았다. 자동차업계에서도 닛산이나 이스즈자동차는 일찍부터 대량의 인원정리를 실시했다. 그러나 도요타 강령을 존중한 기이치로는 종업원의 해고를 가능한 한 피했다. 도요타자동직기 등 실적이 좋은 섬유 관련 도요타그룹의 기업으로부터 지원을 받을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도 한계가 있었다.

기이치로는 1949년 12월에 도요타의 금고가 텅텅 비었다는 것을 알고서도 노동조합과 인원정리를 하지 않겠다는 취지의 각서를 교환했다. 그러나 이것이 화근이 된 도요타는 1950년에 도산으로까지 내몰리며 이듬해에는 종업원을 감원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노동쟁의로 발전했고 결국 기이치로는 자신이 퇴진하며 사태를 수습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맛 본 경영의 쓴맛을 이후의 도요타의 경영자들은 잊지 않고 계승하고 있다. 결국 도요타의 인원정리는 이때뿐이었다. 도요타는 인원정리를 하지 않는 것을 사시()로 정하고 있다. 종업원들은 이를 알고 있기 때문에 더욱 열심히 생산성 향상에 매달릴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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