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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후] 오키나와 전투 ‘한국인 자살특공대’ 기록 첫 확인
권혁선  (2015년 08월 20일 21시58분22초)  


입력 2015.08.19 (18:02) | 수정 2015.08.19 (19:21) 취재후
[취재후] 오키나와 전투 ‘한국인 자살특공대’ 기록 첫 확인
일본 오키나와는 2차대전 말기 일본 본토에서 유일하게 미군이 상륙해 참혹한 지상전 전투가 벌어진 곳입니다. 1944년 태평양 일대의 점령지를 모두 잃고 미군에 밀려 곤경에 빠진 일본군 대본영은 ‘본토 수호’라는 명령으로 오키나와에 주둔한 제32군에 ‘옥쇄’를 명령했습니다.

병력이 절대 부족했던 일본군은 오키나와 현지 주민 2만 6천 여명을 방위대로 징집해 약 10만 병력 체제로 미군 공격에 대비한 긴급 작업에 착수했습니다. 당시 일본군은 오키나와 일대에 비행장 15곳을 비롯해 각종 기지 구축 등을 진행하면서 노동력이 많이 필요하게 되자 식민지 한반도에서 인력을 대규모로 강제 동원했습니다. 1944년 9월 ‘국민징용령’을 발표한 것도 이같은 맥락에서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군대에 소속된 잡역부라는 뜻으로 ‘군부’라는 이름으로 끌려간 이들의 규모는 대략 만명 이상으로 추정되지만, 남아 있는 기록이 거의 없어 정확한 규모와 피해 실태 등은 7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미궁 속입니다.

2차대전 말기 일본에 징용된 한국인
▲ 2차대전 말기 일본에 징용된 한국인


전쟁 말기 일본 본토의 탄광과 공장 등에도 많은 한국인들이 끌려갔으나 그 대상이 주로 군수관련 기업들이었습니다. 이에 비해, 오키나와의 경우 직접 일본군 부대에 군속으로 배치된 데다 전투현장에 끌려간 경우가 많아 인명 피해가 훨씬 컸습니다.

취재진은 오키나와 현지에서 수소문한 결과 한국인 군부 문제를 연구해 온 이즈하라씨를 만났습니다. 그는 지난 10여년동안 오키나와에 강제 징용된 한국인 군 기록과 관련 자료 등을 모아왔습니다.

그 가운데 취재진의 눈길을 끈 것은 한국인 군부들로 구성된 ‘특설 수상근무대’ 부대 자료였습니다. 이 부대는 1944년 6월경부터 경상북도 전역에서 강제 동원된 군부 2646명으로 구성된 지원부대로, 주로 항만 등지의 군수물자 운반에 동원됐습니다.

이즈하라씨 소유 한국인 군 기록
▲ 이즈하라씨 소유 한국인 군 기록과 관련 자료


취재진은 현재 남아 있는 ‘수상근무대’ 명부와 부대일지, 중대별 사료(101 ~ 104까지 4개 중대로 구성) 등을 통해 전쟁 말기 한국인 군부들의 오키나와 강제징용 피해 실태를 추적해 봤습니다.

우선 명부 내역을 상세히 확인한 결과 사망 사실이 기록된 사람은 261명 뿐 나머지는 대부분 행방불명으로만 표시돼 있어 정확한 인명피해 실태를 확인하기 어려웠습니다. 일본군 부대의 경우 전사자의 신원과 사망경위 등을 부대별로 상세히 기록해 놓은 것과 비교해 강제 징용 한국인들에 대한 일본 측의 무책임한 대응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더구나 사망이 확인된 군부들의 경우 대부분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한 사실을 명부 한쪽에 별도로 기록해 놓았습니다.

중대별로 약 6~7백명씩 구성된 수상근무대 가운데 대부분은 항만의 군수물자 운반 작업에 동원됐습니다. 수상근무대 작업실적을 기록한 부대일지를 살펴보니 탄약과 식량, 건축자재 등 무거운 군수품을 나르는 중노동에 하루 11시간이상씩 투입됐고 먹을 것을 제대로 배급받지 못했던 가혹한 노역 상황이 기록돼 있었습니다. 또 부대기록 곳곳에선 ‘무학문맹’ 혹은 ‘3등 국민’ 등 한국인 군부들을 멸시하는 차별적 표현도 확인했습니다.

아카시마
▲ 아카시마


취재진은 수상근무대의 징용 현장 취재를 위해 1945년 3월 26일 오키나와 일대에서 가장 먼저 미군이 상륙했던 아카시마를 방문했습니다. 오키나와 나하 항에서 뱃길로 한 시간 떨어진 인구 3백명 규모의 작은 섬 아카시마엔 미군 상륙 한달전 수상근무대 103중대 소속 한국인 군부 150여명이 일본군에 끌려왔습니다.

이들은 주로 미군 함정에 돌진하는 자살공격용 특공정을 운반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는데 지금도 이 섬엔 당시 특공정을 숨겨 놓았던 인공 동굴 30여곳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취재진은 수소문 끝에 당시 15살 나이에 지역 학도병으로 군에 입대했던 가키노하나씨(85세)를 만났습니다. 그는 한국인 군부들의 피해 실상을 증언하고 무더위 속에 취재진을 직접 피해 현장까지 안내하기도 했습니다.

가키노하나씨는 취재진에게 미군 상륙 직후 지상전이 벌어진 상황에서 한국인 군부 7명이 탈출 시도를 했다는 이유로 총살 당하는 모습을 마을 주민들이 함께 목격했다고 증언했습니다.

그는 또 마을 뒷산에 감금호를 파고 도주 우려가 있다며 군부 50여명을 강제로 가둔 사실도 밝혔습니다. 도저히 인간으로서 견딜 수 없는 참혹한 상황에서 매일 몇 명씩 영양실조와 질병으로 목숨을 잃었다는 게 가키노하나씨의 증언이었습니다. 종전 후 아카시마에서 미군에 포로로 잡힌 군부는 70여명으로 결국 70명 이상이 이 섬에서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1945년 4월 1일 미군이 오키나와 중부 요미탄에 상륙하자 결사항전을 선언한 일본군은 남쪽으로 계속 후퇴하며 6월 23일 항복할 때까지 참혹한 지상전투를 벌였습니다. 한국인 군부들의 인명피해가 가장 컸던 것도 바로 이 시기였습니다.

취재진은 수상근무대 중대별 사료를 통해 일본군에 끌려 남부 전선으로 이동한 군부들의 최후기록을 살펴봤습니다. 사료를 통해 총탄이 빗발치는 전투현장에서 군부들을 탄약을 운반하는 데 동원한 것 뿐 아니라, 최후 국면엔 직접 자살 공격대원으로 투입한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자살공격대


수상근무대 104중대 기록엔 당시 최후 전투지였던 야마시로 일대에서 부대원들이 5월 29일 직접 전투에 참가해 6월 22일 전원 자살공격대로 투입됐다고 적혀 있고, 102중대 사료엔 6월 21일 생존자 3명을 제외하고 중대원이 전멸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결국 수상근무대 한국인 군부 가운데 적어도 절반 이상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정확한 사실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최후 전투지였던 야마시로 주민들은 전쟁이 끝난 뒤 그 일대에서만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유골이 3만 5천구나 돼 커다란 구덩이를 파고 한꺼번에 쌓아 놓았다고 증언했습니다. 지금도 ‘혼백의 탑’이란 이름으로 남아 있는 매장지엔 한국인 군부들의 유골도 포함돼 있다는 게 주민들의 설명이었습니다.

오키나와 전투 희생자 24만여명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만든 평화공원 한켠엔 신원이 확인된 사람들의 이름을 새겨 놓은 비석이 서 있습니다. 이 가운데 한반도 출신자는 447명으로 적어도 만명이 넘는 강제징용 규모를 생각하면 터무니 없이 적은 숫자입니다. 하지만 남아 있는 기록이 거의 없어 대부분의 경우 강제 징용이나 사망 사실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없는 게 현실입니다.

오키나와 현지에서 취재를 진행하면서 줄곧 머릿속을 떠나지 않은 것은 식민지 시대 머나먼 이국 땅에 끌려와 강제노역에 시달리다 결국 전투현장에서 숨진 한국인들의 비참한 최후, 그리고 광복 70년이 되도록 그 진실이 대부분 어둠 속에 묻혀 있는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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