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혁선의 역사 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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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학습자료] 

일본과 러시아 북방4도 이야기3
권혁선  (2015년 07월 19일 11시15분32초)  


북방 4 도(島)와 마지막 생쑈<下>

 


- 상륙작전 경험이 전무한 소련 침공군을 태운 함대는 일단 1945년 8월 18일 02시, 시무슈 섬 앞바다에 집결했고 상륙군 사령관 그네치코(Gnechko) 소장은 작은 면적의 교두보에 집중적으로 상륙한 후, 야포와 박격포를 빠르게 양륙하여 전개시키면 비교적 안전한 교두보를 구축 할 수 있으리라는 막연한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 한편, 소련군이 이렇게 완전한 군사작전으로써의 상륙작전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은 까맣게 모른 채, 시무슈 주둔 일본군은 8월 15일, 일왕의 항복 방송에 이어, 홋카이도의 제 5 방면군 사령부에서 “8월 18일 16시에 휴전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그 이전에 적의 선제공격이 있을시, 자위적 전투는 현지 지휘관의 판단 하에 수행하여도 무방하다”라는 명령을 받았다.

 

 

       일본 제 5방면군 사령관의 히구치 기이치로 중장과 쿠릴 열도 일대의 일본군 방어 부대

 

 - 따라서 이들은 17일까지 이 사항을 각 예하 부대에 전달하였고, 전차의 주포를 철거하고 화학 무기를 바다에 수몰시켜 처분하는 등 무장을 해제할 준비를 시작했다.
- 또한 시무슈 섬 주둔 일본군들은 17일 캄차카 반도 연안에 상륙함을 비롯한 다수의 함정이 이동하는 것을 발견했지만, 항복 선언 이후 소련군이 침공할 가능성은 없다며 이를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으며(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일본은 미국에 항복했지 소련에 항복한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또라이들..) 단지 17 일 야간, 예상 상륙지인 타케다(竹田) 해변에 경계를 지시하고 제 282 독립 보병 대대 예하의 1개 중대와 속사포 3문, 야포 5문, 구포(臼砲) 4문 등을 전개시켰다.

 

 

                 시슈무에 탱자거리던 제 11 전차연대와 예상 상륙지인 타케다 해변..

 

- 이윽고 1945년 8월 18일 02시 30분, 소련군의 상륙 제 1파인 약 1,000명으로 구성된 해군 보병 대대가 시무슈 섬 다케다 해변으로 상륙하기 시작했는데 역시 상륙전 경험 부재의 허술함이 그대로 드러나서 수심을 정확히 알지 못한 상륙주정들이 중화기를 과도하게 적재한 채 무대뽀로 접근하다 대부분 해안에 좌초하는 바람에 소련군 병사들은 대부분의 중화기를 함정에 놔둔 채 헤엄쳐서 해안에 도달했다. 
- 이들 소련군이 아무런 사전 연락 없이 기습적으로 상륙해 들어오자 상륙지를 방어하던 일본군 제 282 독립 보병 대대는 즉시 반격에 나섰고 소련군도 함포 사격과 함께 캄차카 반도 로빠트카 곶의 해안포도 지원 포격을 개시했다(이때 누가 먼저 사격을 개시했는지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는 않으며 증언에 따르면 거의 동시였다고..)

 

 
- 소련군의 상륙 제 1파 부대는 경미한 피해만을 입고 상륙 개시 30만에 일본군의 해안초소를 유린하며 섬 내륙으로 전진했고 03시 30분경에는 상륙 부대의 주력 제 138 저격 연대가 상륙하기 시작했다.
- 이때 이미 소련군의 대대적인 상륙사실을 인지한 일본군은 격렬한 포격을 가해 상륙용 주정 5척을 격침시키고 다수의 상륙주정들을 파괴하였으며 이때 상륙 통제 부대와 통신대를 태운 상륙정이 파괴되며 07시경에 제 138 저격 연대의 상륙은 완료되었지만 상륙 통제부가 작살나고 통신대마저 날아가 버려 부대의 통제는 개판이 되었고 건진 중화기라고는 달랑 대전차포 4 문이 전부였다.
- 소련군은 함포 사격 등으로 일본군 해안포대의 제압을 시도했지만 효과가 없었고 제 373 저격 연대의 상륙은 계속 07시 경에 시작되었지만, 일본군의 포격에 10시가 되어서야 가까스로 완료되었고 여전히 대부분의 중화기는 수송선에 남겨진 채로, 상륙한 소련군은 그냥 알보병 집단이었을 뿐이었다.

 

 

                    소련군의 작전 상황과 시슈무 섬 코쿠탄 곶의 파괴된 등대..

 

- 소련군이 시무슈 섬에 상륙했다는 보고를 받은 일본 제 5방면군 사령관의 히구치 기이치로(樋口季一郎) 중장은 제 91사단에 대해 “결단코 반격하여 소련군을 격멸할 것"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 명령을 받은 제 91사단장 츠츠미 후사키(堤不夾貴) 중장은 즉각 인근 파라무시로 섬에 주둔하고 있던 제 74여단을 시무슈 섬으로 이동하도록 명령함과 동시에, 시슈무의 제 73여단은 동원 가능한 부대를 죄다 집결시켜 반격을 가하고 이케다 스에오(池田末男) 대좌가 지휘하는 제 11 전차연대에도 반격 명령을 하달했다.

 

                          시슈무 섬의 전차에 타고있는 제 91사단장 츠츠미 후사키 중장

 

- 이에 따라 제 11 전차연대는 즉시 반격에 나섰고 제 73여단 또한 누마지리(沼尻)에 배치되어있던 제 283 독립 보병 대대를 소련군의 동쪽 측면에 진출 시켰으며 다른 부대들도 소련군 전면으로 전진하기 시작했다.
- 일본군 제 11 전차연대는 8월 18일 05시 30분, 시레이(四嶺) 산에 위치한 소련군에 돌격을 감행, 이들을 격퇴하고 산 북쪽 사면의 소련군도 후퇴시켰으며 시레이 산 남동쪽의 일본군 고사포 지원 포격에 힘입어 제 283 독립보병대대도 전차를 선두에 앞세우고 돌격하자 소련군은 다수의 사상자를 내고 최초 상륙 지점이던 타케다 해변으로 퇴각했다.

 

 

                            제 11 전차연대장 이케다 스에오 대좌와 당시 상황...

 

- 하지만 소련군도 일본군의 전차 돌격에 맞서 대전차포 4문과 대전차 총 100정을 결집, 격렬하게 저항하였고 97식 중전차나 95식 경전차 같은 2차 대전 최악의 깡통전차로 구성된 제 11 전차연대는 27대의 전차가 파괴당하고 이케다 연대장 이하 96명의 전사자가 발생하며 거의 괴멸되었다(여기에 더해 소련군은 일본군의 주특기, 대전차 총검술까지 감행했다..-_-;;)

 

 

    일본 전차 부대는 한 때 나마 위세를 떨쳤지만 역시 깡통전차의 한계는 벗어날 수 없었다..

 

- 18일 오전, 시레이 산을 다시 일본군이 재점령하자 상황은 되려 일본군에게 유리해졌고 몇 차례 소련군의 공격도 격퇴하는데 성공했으며 파라무시로를 출발한 제 74여단 병력도 시슈무 섬에 도착하여 방어선에 합류하기 시작하였다.
- 하지만 1945년 8월 18일 오후가 되자 제 5 방면군 사령관 히구치 중장의 휴전 및 자위 전투 중단 명령이 있었기에 제 91사단은 정해진 정전시간에 따라 18일 16시를 기해, 적극적 전투를 중단하기로 결정했다(이것들 뭐래? 애초부터 손들면 되쟈나? 아무튼 꼴통들이다..) 
- 하지만 전투는 중단되지 않았고 18일 16시, 정전 시간이 되었지만 여전히 소련군 상륙 부대는 일본군에 대해 공격을 감행했으며 함대와 로빠토카 곶에서의 포격과 항공 폭격도 계속되었다.
- 이때 제 5 방면군 사령관 히구치 중장은 대본영에 시무슈 섬의 교전 상황을 보고했고 대본영은 맥아더를 통해 스탈린 측에 휴전을 제의했지만, 스탈린은 이를 쌩깠다.

 

 
- 이때 스탈린이 쌩깐 것에 대해 여러 가지 의견이 분분하지만 가장 신빙성이 있는 주장(..이 아니라 봉달이가 추측컨대..-_-;;)은 스탈린 자신이 의도 했던 것처럼 쿠릴 열도 점령에 대해 일본군과의 전투로 소련군이 다수의 사상자를 내어 정당한 피의 댓가를 요구하려는 노림수가 들어가 있었다는 주장이다.
- 이 정해진 정전시간 이후로 일본군은 대대적인 교전을 회피하며 후퇴를 거듭하였지만 산발적인 전투가 3일 후인 21일까지 계속해서 이어졌고 일본군이 완전히 항복하는 21일까지 소련군에서는 1,567명(516명 전사, 1,051명 부상 및 실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일본군은 1,018명(256명 전사, 762명 부상)의 사상자가 발생했다(아무 의미 없이 3,000여명이 죽거나 다쳤다는 얘기다..)

 

                    이거 뭐하자는 거냐?..일본 군기를 노획한 소련군 병사들...

 

- 당시 소련군의 피해가 많았던 이유로 소련군이 일단, 상륙전에 대한 경험이 전혀 없었고, 상륙한 해안이 좁은 지형이어서 효과적인 공세가 이루어지지 못했으며, 악천후로 인한 항공 지원의 부재, 상륙 당시 대대적인 함포사격과 폭격이 없었고 이 지역의 일본군들은 전투가 없었기에 물자가 풍족했으며 베테랑들이었다는 점, 최종적으로 소련 상륙군은 전차 1대 없는 순전히 알보병이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는데
- 문제는 아무리 소련군이 상륙전에 무지했더라도 그간 태평양 전선에서 벌어진 숱한 상륙 작전의 성공과 실패 과정을 충분히 보아왔고 당시 미군이 소련군에 대해 적극적인 지원과 정보 공유를 해 주었으므로 저렇게 허술하게 공격을 시작하여 막대한 피해를 입은 원인을 전부 소련군 현장 지휘부의 정보 부족과 상륙전 미숙이라는 것으로 돌릴 수 있느냐는 점이다.

 


- 따라서 전투 중반에 이미 보고를 받았음에도 스탈린이 이를 무시했다는 점, 그간 스탈린이 행해왔던 막장짓의 사례, 쿠릴 열도 획득의 정당성 확보 같은 배경을 놓고 볼 때 스탈린은 소련군 병사들의 목숨을 제물로 던져 영토 확보 주장을 뒷받침하려는 계략을 꾸몄다는 추측은 상당히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정전 시간에 매달려 지랄한 일본군도 얼척 없기는 마찬가지다..그냥 손들었으면 됐쟈나? 힌두교 신 히로히토의 명령을 지켰다는데 뭐..도찐개찐..-_-;;)
- 아무튼, 시슈무 섬에서는 산발적인 전투가 계속 이어지다 1945년 8월 21일 07시, 소련상륙군 사령관 그네체코 소장이 츠츠미 91사단장에게 일본군의 항복과 무장 해제라는 최후통첩을 보냈고 21일 21시에 일본군이 이에 응하며 소련해군 함상에서 츠츠미 사단장은 일본군의 항복문서에 조인했고 23일까지 일본군은 소련군의 감시 하에 전원 무장 해제되었다.

 

                    항복 문서에 조인하는 쿠릴 열도의 일본군과 소련군...

 

- 이후 쿠릴 열도의 나머지 섬들은 훨씬 쉽게 소련군의 손에 떨어졌고 소련은 1945년 9월 5일까지 쿠릴 열도에 대한 점령을 완료했다.
- 임무를 완료한 소련군은 무장해제한 일본군 병사들을 포로로 잡아 막사수리 및 월동준비 등 쿠릴 열도의 기간 작업에 투입한 후 1945년 10월 중순, 목적지를 알리지 않은 채 선박에 태워 그대로 시베리아로 보냈다(크흑~~ -_-;;)
- 당시 약 1,600명의 일본 민간인이 시무슈 섬에 남겨졌는데 소련 점령 후 민간인들은 현지에 억류되어 어업과 건설현장 등지에서 일하다가 1947년 9월 20일, 귀국을 희망하는 일본 민간인 전원은 섬을 떠나 홋카이도로 귀환했다.

 

                           이후 소련군의 쿠릴 열도 점령 경과..

 

- 이렇게 쿠릴 열도는 2차 대전 종결과 함께 소련 영토가 되었고 이는 어찌 보면 승전국으로써의 당연한 권리인데 문제는 일본이 “역사적으로 고유 영토”라고 씨부리며 이의 반환을 요구한다는 데 있다.
- 앞서도 밝혔지만 쿠릴 열도가 일본의 고유 영토라는 주장은 당치도 않은 소리이고 다시 1855년에 에도 막부와 러시아 정부가 맺은 조약대로 돌리자는 얘기인데 이 조약 자체도 지네가 먼저 러일전쟁 일으켜서 쓰레기로 만들어 놓고는 이제 와서 딴 소리를 하고 있다는 점에서 어찌 보면 참 어처구니가 없다.
- 전후 1952년 4월에 조인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일본은 쿠릴 열도 전체에 대한 일체의 권리를 이미 포기했고, 이투루프 섬과 쿠나시르 섬은 일본이 영유권을 포기한 쿠릴 열도에 포함되며 얄타 회담에서 소련의 참전이나 전후의 쿠릴 열도 할양은 연합국에 의해 사전에 승낙되었으므로 당연히 이는 러시아의 영토가 맞다는 것이 국제법적인 관점이다(그런데 일본은 샌프란시스코 조약에 소련이 참가하지 않았으므로 무효랜다..당시 냉전이 한창이고 한국에서는 전쟁까지 났는데 이 쓰레기들은 이런 소리를 하고 자빠진다..-_-;;)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과 이때 작성한 지도에도 독도는 일본 영토에서 빠져있다..또라이들...

 

- 사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전한 독일은 이후 프랑스, 러시아, 폴란드 등에게 영유권이 넘어간 알자스와 로렌, 칼리닌그라드, 동 프로이센 같은 이전 독일 영토들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깨끗이 포기했으며 일본도 쿠릴열도 4개 섬의 포기는 당연한 것이다 라는 게 나의 개인적인 생각이다(니네가 그런 식이면 독일은 어쩌라고? 사실 동 프로이센 같은 경우 독일계가 80% 이상이었다..근데 쿠릴은? 죄다 아이누 족이었다..고유의 영토? 미친놈들이쟈나?)

 

               2차 대전 이후의 독일..점선이 폴란드와 소련에 넘어간 지역이다..

 

- 게다가 독일은 일본과 달리 패전 후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점과 유태인 학살 등 전쟁 당시 저지른 전쟁범죄에 대한 잘못을 깨끗이 시인하고 사과하고 있는데다 전후 독일의 태도 자체가 일본과는 하늘과 땅 정도의 차이가 있다는 데 반해
- 일본 자체가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쓰레기 전범국인 걸 감안하면 포기는 못할망정 일본이 쿠릴 열도를 가지고 영토 반환 하라고 러시아와 영유권 분쟁을 유발하는 행태는 어딜 봐도 비난 받을 여지 밖에는 없다.

 

         2012년 쿠릴 열도를 방문한 메드메데프 러시아 총리..일본은 당연히 빡쳤다..

 

                 몰락작전 실행 이후의 예상 분할 점령도..차라리 이게 훨씬 나았다...

 

- 그러면서 이놈들은 유엔 상임이사국 하겠다고 설레발을 치고 있는데 기존 상임이사국인 러시아가 일본과 영유권 분쟁을 문제 삼아 강경하게 반대하고 있으며(중국은 과거사 문제와 센카쿠 영유권 문제로 반대..) 이는 러시아가 일본과 마찬가지로 제2차 세계대전 전범국이지만 철저히 과거를 반성하고 주변국과 마찰을 일으키지 않는 독일의 상임이사국 진출에 반대하지 않는 것과는 극히 대조적이다.


<끝>

 

 

 

<사진출처>

http://www.h2.dion.ne.jp/~mogiseka/article/100821shumushu.htm
http://ykiats.exblog.jp/i5
http://www.jiyuushikan.org/rekishi/rekishi244.html
http://d.hatena.ne.jp/Ichiho0616/20070818/1187395518
http://blogs.yahoo.co.jp/kgjbb/25452850.html
http://www.ww2incolor.com/japan/jap8fp.html
http://gallimafry.blogspot.kr/2014/06/russia-attacks-japanese-manchuria.html
http://www.armchairgeneral.com/rkkaww2/maps/maps1945E.htm
http://www.gornai.ya1.ru/mil/4916-vtoraya-mirovaya-voyna-sovetskie-voyska-v-boyu.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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