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혁선의 역사 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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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학습자료] 

청산리 전투- 러시아 모시 나강 91식 소총2
권혁선  (2015년 06월 13일 07시29분03초)  


2차 세계 대전 초기 토카레프 자동소총이 지급되었었다.

같은 7.62밀리 실탄을 쓰지만 열 발들이 탄창이 장착되어있고
반동을
줄여 주는 소염기도 붙어 있어 그 당시 세계 첨단의 반자동
군용총인 미군의 M1소총보다는 개념적으로 앞서 있었다.

 

토카레프 소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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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은 이 신형 총기에 큰 기대를 가지고 반자동 소총이
볼트 액션 소총보다도 명중률이 떨어지는데도 여기에 조준 망원경을
달아서 저격병에까지 지급을 했었다.
반응이 좋았으면 이 토카레프 소총은 모신 나강을 대치했을 것이다.

 

그러나 엄혹한 환경에서 질 낮은 소련 병사들이
다루어야 하기 때문에
고장이 속출하는데다가 명중률도
모신 나강만 못했기 때문에
모신 나강을 대신 할 기대를 모았던
이 토카레프 소총은 퇴출되고
모신 나강이 계속 그 자리를 지켰었다.

 

모신 나강은 바로 러시아군의 환경에서 교육 수준 낮은
러시아 병사를
위해서 만들어진 총으로서 비록 세련미와
기계 가공의 정밀도에 있어서 서
방의 총기에 뒤떨어진다 해도
그 강인함과 고장 없음은
가히 정평이 나있다.

 

대독 (對獨) 전투시 혹한의 날씨에 독일군의 모젤 소총은 얼어 버려서
잘 나가지 않는데도 모시 나강은 이상 없이 작동되었다.

 

그 뿐만 아니라 명중률도 좋아서 전방의 독일군들은 노획한
망원 조준경이 달린 저격용 모신 나강을 후방으로 후송시키지 않고
사격 솜씨 좋은 부대원에게 주어져
그대로 전 주인들을 저격함에
사용했다고 한다.


이처럼 그 명중도에 있어서도 잘 맞았기에 모신 나강은
소련군에서 뿐만 아니라 또 다른 서쪽 전선에서  반대로

러시아군을 향하여 사용되기도 하였다.

 

바로 핀랜드인데 원래부터 러시아의 영향력이 컸던 이 나라에서

모신 나강을 생산하여 자기 나라의 기본화기로 썼었다.

 

원래 기계 공업이 발달한 이 나라에서 만든 모신 나강은
러시아에서
만든 것보다 더 잘 만들어져서 명중률이 더 좋았다.


핀랜드 제 모신 나강은 핀랜드 군이 러시아 군에게 구사했던

모티(motti) 전술에서 무수한 러시아 군을 사살했다.


모티란 장작개비를 의미하는데 러시아 군을 밀림 속으로 유인해놓고
여기저기서 병력을 장작개비처럼 토막을 내어
적을 죽였다고 한다.

이 전술에서는 핀랜드 군의 유명한 스키와 수오미 기관 단총과함께
모신 나강도 한몫을 하게 된다.

흰 눈 사이에 매복했다가 모신 나강으로 저격 해대는 핀랜드
저격병들 때문에 러시아군은 큰 피해를 입었다.


사이모 하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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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역대 사상 최대 저격병인  사이모 하이하가 탄생했는데 그는
조준경도 안 달린 핀랜드 제 모신 나강으로 눈 덮인 숲 사이를 유령처럼 누비며

무려 542명의 소련 군을 저격했다.

여기에 더해서 기관단총이면서도 정교하게 만들어져 미제 칼빈 소총
수준의 명중율이 있던 수오미 기관단총으로 200여명을 더 사살했다는데 이는 확인되지
않고있다.
그는 이 모든 전과를 단 100일에 이룩한 것이다.
이 기록은 저격 역사 최고 기록이다.

서쪽에서 러시아군 아닌 다른 민족에 의하여서 역사적인 사용을
했다면
동쪽에서는 우리의 독립군에 의해서 크게 사용되어
전과를 올린 것이다.

 

원래 만주지역에는 러일 전쟁으로 일본군에게 밀려난 러시아군이

장기체류하고 있었고 볼쉐비키들에게 밀려온 백계 러시아 사람들이

많아서 러시아 무기가 많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특히 모신 나강은 러시아 사냥꾼들은 물론 만주현지 포수들도
많이
사용하던 총기였다.

 

모시 나강의 성능은 이 총의 수명을 길게 해주어 1960년대에
망원 조준경을 달고 월남전에 나타난다.

저격용 모신 나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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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월 국군이 낡은 MI총과 칼빈 소총을 들고 힘겨운 전투를 할 때
이미 정규 월맹군이 최신 AK-47소총으로 무장했을 때니
모시 나강의 정확한 성능이 그런 늦은 시기까지도 인정을  받고 있었다는 증거다.

 

전투 참가자의 회고담을 들어보면 작전 중 제일 공포스런 순간이

수색 정찰 중 고요한 밀림 한구석에서 “ 따쿵!” 하는 모신 나강의

총성이 울리는 순간이었다고 했다.


그러면 부대원중 하나가 반드시 피해를 입고 쓰러진 뒤고 사격한

적 저격병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뒤라고 한다.


한국군의 일화는 아니지만 월남전에서 러시아군의
모시 나강 저격총이
남긴 일화가 있다.

 

카를로스 해쓰칵 상사 -몇년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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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전에서의 미군의 저격병 양성과 운용은 육군보다도 해병대가 더 적극적이었다.

해병대 저격병에서 큰 활약을 한 사람은 Carlos Hatchcock 상사로서 미국의 1,000야드의

장거리 사거리로 유명한 캠프 페리 사격 대회에서 우승한 사람이었다.
그는 두 번에 걸친 월남전 참전에서 93명의 적병을 사살했다.

그의 저격중 적의 저격수와 겨룬 믿기 힘든 실화가 있다.
어느 석양에 카르로스는 지역에 출몰하면서 미군들을 저격하던
한 월맹
저격수와 대결하게 된다.

 

도대체 신출귀몰하는 이자의 정확한 위치를 알 수가 없어 계속 수색과 관찰은 하던 중

그의 10배 조준경에 건너 언덕에서 지는 햇빛에 반사하는 작은 빛이 포착 된다.

 

그는 즉시 그 것이 적의 모시 나강 소총의 조준경이 렌즈가 반사하고 있는 것을 알아 차린다.

 

적병 역시 그를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간발의 차이로 그가 먼저 그 반사 빛을 향하여 방아쇠를 당긴다.

우수한 성능의 윈체스터 소총에서 발사된 30-06싵탄은 그대로
적병의 렌즈를 뚫고 조준경을 깨끗이 관통하여 적 저격병을 사살했다.

 

일화가 너무도 극적이었기 때문에 그 뒤 여러 영화에서 이 사실을

바탕으로 해서 만들어진 픽션이 소개되었다

그중 하나가 라이언 일병 구하기 일 것이다.

 

한국 민과 청산리 전투에서 맺은 모신 나강과 맺은 인연은 다시
한반도의 동족상쟁의 대결장에 김 일성 부대에 의해서 남쪽 동포를
살상하는 도구로 반갑지 않은 변신을 해서 나타난다.

 

남한에서는 모신 나강이나 북한식 명칭인 보총으로 불리지 않고

딱쿵 총으로 불렸다.

발사할 때 생기는 모신 나강의 총성이 특유의 발사음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이때 모신 나강은 한 세대전의 모델보다 반 뼘쯤 줄어든 짧은 모습이었다.

독일 이 2차 세계 대전의 모젤도 1차 세계 대전보다 더 줄어들었으니만큼 독

일의 군사 문화를 줄기차게 모방해온 러시아에서도 당연히 따라서 했을 것이다.

 

북한군은 3년간의 침략과 패퇴와 대치의 주요 전투에서
이를 어떻게
사용했는가하는 일화는 나중에 소개하기로 한다.

 

단지 모시 나강이 국군 측에 의해서도 북한군에게 대량 사용한
흥미로운
사실은 소개할만하다.

 

한국 전쟁 중 황해도 서해안 일대와 도서는 정규군인
국군이 아니라 미군의 지원을 받는 일명 동키 부대라는
구월산 유격대가 공산군과 피 말리는 전투를 하며
확보 해낸 곳이다.

 

여러 직업을 가졌던 북한 출신 민간인들로 잡다하게 구성된
유격대였지만 전투에서는 용감히 싸워서 미군 고문관들의
찬사를 받았었다.


이들이 미군의 본격적인 군수지원이 있기 전에는 전적으로
이 모신 나강으로 싸웠었고 커다란 전과를 올렸었다.

 

한국 전쟁이 한참 일 때 한국 육군 본부는 북한이 그래왔듯
남한도 북한에
유격대를 보내기로 하고 600명 규모의 유격대를
구성해서 북파했다.

백골 병단이라는 이름이 붙은 유격대 지휘관은 유명한 채명신 중령.

 유격대는 북한군 복장에 북한군 무기로 완전 변장하고 북한군
후방에
침투하여 남파중이던 남부군 사령관 임명자 길원팔을
생포해서 처단하는등
대활약을 하고 4개월 뒤 귀환하였다.

 백골병단의 대원들이 무장하고 북파 된 기본화기가 노획한
모신 나강이었다.

 

이때의 전공으로 채명신 장군은 게리라전 전문가로 소문나게
되어
나중에 주월 한국군 사령관이 된다.

 

모신 나강과 한국군과의 악연은 베트남으로 이어진다.

역시 베트콩들이나 월맹군들은 이 모시 나강으로 주월 한국군을

저격해서 다수의 사상자를 내게 했다.

 

청산리 전투에서 우리 독립군이 어떻게 모신 나강을 쏘며 전투를
했는가를 생각할 수있는 영화가 몇 년 전 개봉되었었다.

지금도 비디오 대여점에 가면 영국인 배우 쥬드 로우가 주연한

그 프로를 빌릴 수가 있다.


자이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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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치열한 스타린그라드 전투에서 저격수로 크게 활약하여
소련의

영웅이 된 실존 인물 바실리 자이체프를 모델로 한 영화

‘ENEMY AT THE GATE"이다.
자이체프는 그의 참전중 무려 225명의 독일군을 저격했었다.

모시 나강 소총이 거의 주연급으로 출연하는 특이한 영화다.

영화는 모신 나강의 저격수 자이체프와 독일군 올림픽 대표
사격 선수였던 모젤 소총의 쾨니그 소령의 대결을 그린 것인데
실제로 있었던 사실을
기본으로 다분히 소설적 허구를 가미해서
구성한 것이다.
결국은 쫓기고 쫓고 숨고 저격하는 숨 가쁜 대결 끝에 자이체프가
승리한다.

 

올림픽에서 사격 선수로 출전한 진짜 쾨니그 소령이라는
사람은 독일군에 없었고 더더구나 스타린그라드 저격부대에는

그런 신분의 장교는 없었다고 하는데 전후로 보아 거짓말 잘했던 소련군
정치장교들이 전과 높은 자이체프를 영웅화
하기 위해서
그에게 저격 당해 사살된 독일 장교를 모델로 해서 만든
허구의
선전 일화일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이 영화로 미국의 중고품 군용 소총 시장에서 홀대 받던
모신 나강의 인기가 급등해서 가격까지 상승하는 효과가 있었다.

 

이 영화를 보면 1920년 화룡현의 청산리등의 산간을 숨 막히게
오르내리며
동포들이 한푼 두푼 모은 성금으로 마련한
모시 나강 소총으로 일본군을
쓰러뜨리며 싸운 독립군의
치열한 전투와 숭고한 애국의 감투 정신이
눈앞에 선히
보이는 듯하다.


독립군들은 이 청산리 전투가 끝나고 악에 바친 일본군의 토벌을

버티다 못해 러시아 영토로 피신하는데 이곳에서 볼쉐비키들에게

속아 무장해제를 당하게 된다


이에 격렬한 저항을 해서 흑하 사변이라는 충돌이 생겼고
동포들이
피땀어린 성금으로 마련했고 독립군들이 조국 광복을
위하여
투쟁의 도구로 썼던 모시 나강은 다시 러시아인들의
손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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