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혁선의 역사 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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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학습자료] 

청산리 전투- 러시아 모시 나강 91식 소총
권혁선  (2015년 06월 13일 07시26분42초)  


한국 근세 총기사

모신 나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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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리 전투에 참전했었던 전 국방부 장관 이 범석 장군의 회고록에서 인용한다.

독립군이 계곡에 들어 온 일본군을 기습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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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곡은 순식간에 콩볶는 소총소리로 나뭇잎과 풀잎새가 몸부림을 쳤다.

소총 사격이 파도처럼 일렁이자 기관총이 불을 품으면서 소낙비같은

연속 폭음이 합세하면서 총탄들이 일본군을 휩쓸었다.

졸지에 기습을 당한 일본군은 메뚜기처럼 사방으로 흩어지며
엄폐했지만 피를 뿌리며 쓰러지는 병사들이 너무도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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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독립군들이 너무 가열되어서 개머리가 타는 냄새가 나도록
사격을
한 소총들은 러시아제 모시 나간트 1891식 모델로 7.62밀리
5연발
볼트 연발식 소총이었다.


이범석 장군과 홍범도 장군은 일제 38식 기병총을 사용했지만

다른 전투원들이 무장했던 소총은 모두 러시아제 모신 나강 소총이었다. 


청산리 백운평 계곡의 전투는 물론 천수평 어랑촌등 10일간 계속된
청산리 전역의 10여 개 전투에서 일본군들을 격멸한 이 총은

또한 그날의 역사적 현장에 오기까지 파란만장한 곡절을 겪은
총들이었다.


이 총들은 제정 러시아 때 개발된소총들이다.

 

원래 사용자들은 제정 러시아의 군인들이었다.

그러니까 멀리는 러일 전쟁 때 만주 평야에서 사용된 총도
있었을 것이고
일차 대전 때 대독전선에서 사용되기도 했던
총이기도 했다.

 

 

모신 나강 소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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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는 1920년 3월 북로 군정서 서일 총재가 군정서 재무부장 계화,
조성환, 양현등를 대동하고 직접 노령으로 들어가 블라지보스토크와
니콜스크에서뿐만 아니라 여러 경로로 구입한 것이다.

 

서일 총재가 구입한 소량의 무기는 봄부터 조금씩 들여왔지만

본격적인 무기 운반은 7월부터 4개 중대 총인원 400 명의
무기
운반대가 그 때까지의 근거지였던 신흥 무관 학교를

도보로 출발해서 밀수꾼들이 쓰는 산길을 사흘이나 걸어서
노령(露領)으로 들어감으로서 개시되었다.


그들 무기 운반대는 노령의 동포들 집에 7-8명씩 흩어져 기식하다가
총을 등에 지
고 같은 험한 길을 돌아서 돌아왔다.


무기 운반대의 삼분지 일이 경비 병력이었고 나머지는 노동력을

제공한 동포들이었다.


총기 운반대는 9월 7일에야 마지막 인원 전원이 귀대하여 끝을 맺었다.


북로 군정서는 이 무기의 구입을 위해서 모연국을 설치하고

재만(在滿)동포들로부터 모금을 했다.

 

부자는 부자대로 많이 냈고 빈자는 빈자대로 십시일반으로
조국 독립을 향한 성의를 표시했다

없는 사람이라도 좁쌀 두 말과 집신 두 컬레를 쾌척했다.

총기는 여러 경로로 조금씩 모아진듯하다.

 

설에 의하면 첵코군에게서 전부 구입했다고 하지만 서일 총재가

체코군이 우라지보스톡에 도착하기 전부터 조금씩 사서

신흥 무관학교로 보냈던 듯하고 만주 영내에서도

러시아 소총들을 구입하여 모아놓고 있던 상태였다.

 

주요 공급자는 볼쉐비키에게 패주해서 동쪽으로 들어온 백계

러시아 인들이 주요 공급자였다.

 

그러나 북로 군정서에 대한 대량 공급자는 나라도 없이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의 연합군에 체코 병단이라는 이름으로
동원되어서 러시아 전선으로 보내져
러시아군과 함께 독일군에
대항해서
싸웠던 체코 군들이었다.

 

그때 체코는 독립국이 아니었으나 조국이 곧 독립이 될 예정이어서

귀국길에 오른 10만 첵코병단은 이때 독일군을 대상으로

오스트리아- 헝가리 연합군의 일원으로서 러시아 전선에서 싸웠었다.

 

그러나 독일과 러시아가 휴전을 하고 체코가 독립을 하자 이들은
고국
귀환 길에 오른다

 

유럽 쪽이 독일에 막혀 있었기 때문에 이들은 러시아를 가로 질러

시베리아를 거쳐 우라지보스톡까지 와서 귀국하는 방법을 택한다.

 

그들 10 만 명의 체코 병단은 징발한 대 열차 대를 타고

키에프를 출발하여 러시아 전역에서 준동하는 볼쉐비키와
싸워가며
시베리아를 가로 지르는 일 년 간의 긴 대장정을 했다.

 

이들은 신문까지 발행하면서 지휘통솔의 체계를 잘 유지해가며

전진해 나갔다.

볼쉐비키들은 레닌의 지시에 의해서 귀국하는
체코 군을
적대했었다.체코 군은 중간에서 자신들의 행로를 방해하는

볼쉐비키 무리들은 철저히 응징했다.

 

볼쉐비키 무리들이 에카테리나에 유폐한 퇴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가족들과

시종들까지도 모두 처형 해버린 것도 근거리까지 육박해 들어온 체코 군들에게

황제 일족을 빼앗길까봐 자행했던 것이었다.


체코 병단이 우라지보스톡 전투에서 사살한 볼쉐비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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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했듯이 청산리 전투는 신흥 무관 학교 -북로 군정서 사관 연성소

 출신 간부 150명을 근간으로 한 650명의 전투원과 기관총 6문
 <2개 기관총 소대>과 2 문의 박격포로 무장한 부대가 거둔 승리의 전투였다.

 

1920년 청산리 전투가 독립투쟁에서 최대의 승리였지만 일본군의

집중적인 토벌이 잇따라 민족 계열의 독립 운동은 쇠퇴하고
1930년대 후반에 들어와서는 중국 공산당에 합류한 김 일성등의 주도 속에
조선인들의
독립활동이 계속 된다

 

특기할 사항은 1920년대까지의 독립 운동에서
모신 나강이 사용되었다면
이 홍광, 김 일성등의 공산계열이
주도한 1930년대 독립운동은
만주 군벌 장작림의 군대에서
흘러 나온 체코제 또는 모젤 98 7.92밀리 소총이
사용된 사실이다.

 

청산리 전투에서 우리 독립군에게 승리를 안겨준 러시아 소총은

통상 모시 -나강 소총이라 불리며 19세기말 무연화약의 시대가

개막되던 시기인 1891년 탄생하였다.

 

무연화약의 실탄을 사용하는 최초의 군용소총인

프랑스제 모델 1886 레벨소총에 이은 두 번째 근대화 총기이다.

모신 나강은 발사 구조를 디자인한 러시아인인 모신과 벨기에

총기 전문가인 나강 형제가 디자인한 탄창 구조가 결합된 디자인이다.

 

나강 형제는 벨기에에 작은 총 공장을 경영하면서
또 다른 러시아의 무기인
나강 7.62밀리 6연발 권총을 디자인해서
러시아에 제공했다. 

모신 나강 권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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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권총 역시 우리 독립 운동과 인연이 있다.

 

그리고 청산리 전투에서 38식 기병총을 사용했었던 이범석 대장은

휴대용으로 이 나강 권총을 지녔었다.



그는 이틀 뒤 어랑촌에서 취침하고 있뎐 일본 기병 중대를
기습해서 거의 섬멸해 버렸는데 이 때 칼을 빼들고 달려드는
일본 기마병들에게 이 권총을
연사하며 몸을 피했었다.

 

모시 나강 소총은 러시아의 무기나 장비가 그렇듯 디자인의
세련미란
조금도 보이지 않는 볼품없는 소총이다.

 

세련미로 말하면 이차 세계 대전까지 사용된 볼트 액션식
소총중에서
제일 못 생긴 군용총중의 하나로 꼽힐 수 있을 것이다.

 

모신 나강은 그 괴상한 대검 때문에 더 안 좋은 인상을 준다.

그것은 다른 여늬 군대의 날이 있는 대검이 아니라 훨씬 길고 가는
일종의
대형 송곳이다.


공산측은 이것을 대검이라고 부르지 않고 총창이라고 부른다.

이와 같이 보기에도 안 좋은 총창을 사용해야 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모신 나강은 추운 북쪽의 동계 전투에 많이 참가했고 육박전에도

동원이 되었었다.

 

그러나 북국의 동계전투에서 두껍디 두꺼운 방한복을 껴입은
적병에게 대
검이 잘 작용을 하지 않았다.

 즉 목적했던 관통이 힘들었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이 꼬챙이 형 대검이다.

이런 형태라면 아무리 옷을 두껍게 입어도 쉽게 찌를 수가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아도 어두운 인상을 주는 공산주의 군대의
이미지를
더 나쁘게 만드는데 일조를 했다.

 

이 총창은 이 태 씨의 ’남부군‘에도 등장한다.

빨치산들이 실수한 동료를 처형 할 때 이 총창이 사용되는
모습이
섬뜩하게 그려져 있다.

 

이 볼품없는 소총의 실탄 역시 볼품이 없다.

20세기 연발총은 다 탄창에 장탄되고 장전 된다는 사실은
거의 고려하지
않고 디자인 된 것으로 아래에
림[RIM-탄피 밑바닥 테두리]이 밖으로
삐죽이 나와 있다.


모신 나강 7.62mm 실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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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때 단발식이 압도하던 군용총 시절의 유물이 아직도

남아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차세계 전에 시작해서 지금까지도 이 실탄은그 탄피가
세계의 주류에서 벗어나
놋쇠가 아니라 제조비가 훨씬 싼 철로
만들어져 왔다.
놋쇠 도금이 되어 있어서 마치 놋쇠로 만든 탄피처럼 보인다.
현재의 AK탄도 이렇게 만들어져 있다.
(다 그렇지 않고 검게 처리한 탄피도 있다.)


모시 나강 탄의 후배인 AK-47탄도 놋쇠가 아니라 철로 만들어져
있어서
그렇지 않아도 러시아제 무기의 거친 디자인 모습에
한 자락을 더해서
보여주고 있다 .

 

러일 전쟁 때 30년 식 소총을 들고 러시아 군대에 맞선 일본군들은

자신들의 소총이 러시아 군대의 모시 나강보다

훨씬 우수하다고 생각 했다고 한다.

 

사실 30년식 소총이 38식보다 한걸음 뒤에 있던 소총이니만큼
그런 소총을
가진 일본군이 모신 나강을 평가 절하했던 사실은
모신 나강이 확실히
인기를 끌지를 못할 여러 요소를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내가 백두산 산록에서 만난 호랑이 포수 최 석도 옹도 자신이 북한군에서

이 썼던 총인데도 별로 좋게 평가 하지 않았었다.


그와 다른 포수들은 인민공사 생산대에서 빌려 쓰던 총 중에서도
가급적 일제 99식 총을 빌려 가지고 사냥을 나가려고 했지,

이 모신 나강 총은 외면했다고한다.

 

이유 중의 하나가 서너 발 사격을 해서 총신이 뜨거워지면 탄피가

약실에 눌어 붙어 빠지지를 않는다는 것이었다.

신축성이 없는 철 탄피의 문젯점이었다.
그는 포수 생활을 하기 전에 한국전에 인민군에 징집되어
원없이 이 소총을 쏴봤다고 했다.
그 때도 연사만 하면 탄피 방출의 문제점을 경험했다는 것이었다.


이 소총을 쏘아본 미국 사람도 이 문제점을 이야기 하는 것을
들은바있다.


1891년도에 세상 구경을 하고 장전과 방출의 말썽도 있는
이 구식의 실탄이 아직도 러시아와 중국의 기본 보병 기관총인
PKM에서 사용되고 있고
드라구노프라고 불리는 러시아
반자동 저격 총에도 사용되고 있으니
세계 군용 총기계의
천대를 받으면서도 총과 실탄은 자신의
숨은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한 것으로 보인다.


냉전시대에 이 탄은 러시아 올림픽 사격 팀의 소총탄으로도
사용되었었다.

 

모시 나강은 총과 실탄의 못 생긴 외모와 크기등 여러 이유로

별반 인기가 없었지만 그렇다고 성능까지도 결함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아무리 변화에 둔감한 러시아군이라 하더라도 성능에 결함이 있었다면

1891년도부터 50년의 세월을 넘어 실전에 배치하지 않았으리라 .


비슷한 때 러시아 군에 지급되었던 나강 리볼버가 1933년
시류의 변화에 따라
신형 토카레프 자동권총으로 바뀐 것을 보면
이를 알 수가 있을 것이다.

 

사실 모신 나강도 한번 위기의 순간이 있었다.

 

2차 세계 대전 초기 토카레프 자동소총이 지급되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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