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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고려의 중앙 관제 사료
admin  (2009년 08월 07일 19시35분48초)  


고려 태조는 개국한 초기에 신라와 태봉의 제도를 참작하여 관직을 설치하고 직무를 나누어서 모든 사무를 처리하였다. 그러나 그 관호(官號)는 혹 방언이 섞이기도 하였는데 초창기라 고칠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다. (『고려사』권76, 지30 백관1 서문)

문하부(門下府). 나라의 온갖 사무를 관장한다. 문하부의 낭사(郎舍)는 간쟁(諫諍)과 봉박(封駁)을 담당한다. 국초에 내의성(內議省)이라 칭하였는데 성종 원년(982)에 내사문하성(內史門下省)으로 고쳤으며, 문종 15년(1061)에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으로 고쳤다.

충렬왕 원년(1275)에 상서성(尙書省)을 합하여 첨의부(僉議府)로 하였으며, 5년에는 원(元)이 첨의부에 정4품의 도장을 보내주었다. 19년에 원이 도첨의사사(都僉議使司)로 고치고, 또 종2품으로 승격시켰다. 공민왕 5년(1356)에 다시 중서문하성이라 칭하고 별도로 상서성을 세웠으며, 11년에 다시 도첨의부(都僉議府)로 고쳤고, 18년에 문하부로 고쳤다. (『고려사』권76, 지30, 백관1, 문하부)

상서성(尙書省). 태조가 태봉(泰封)의 제도를 그대로 따라 광평성(廣評省)을 두어 백관을 거느리게 하였는데, 시중(侍中) 시랑(侍郞) 낭중(郞中) 원외랑(員外郞)이 있었다. 성종 원년(982)에 광평성을 어사도성(御事都省)으로 고쳤으며, 14년에 상서도성(尙書都省)으로 고쳤다.

문종이 상서령(尙書令) 1인 종1품으로, 좌우복야(左右僕射)는 각 1인 정2품으로, 지성사(知省事)는 1인 종2품, 좌우승(左右丞)은 각 1인 종3품으로, 좌우사랑중(左右司郞中)은 각 1인 정5품으로, 좌우사원외랑(左右司員外郞)은 각1인 정6품으로, 도사(都事) 2인 종7품으로, 연속(屬)1)은 주사(主事) 4인, 영사(令史) 6인, 서령사(書令史) 6인, 기관(記官) 20인, 산사(算士) 1인, 직성(直省) 2인으로 정하였다.

충렬왕 원년(1275)에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에 병합하여 첨의부(僉議府)로 하였고 아울러 원리(員吏)를 혁파하였다. 24년에 충선왕이 좌우복야를 첨의부에 두었으며, 또한 좌우사랑중 원외랑 도사 각 2인을 두고 도첨의부(都僉議府)의 별청(別廳)에 모여 일을 보게 하였다가 곧 혁파하였다.

공민왕 5년(1356)에 삼사(三司)를 혁파하고 다시 상서성을 두었으며, 아울러 문종의 구제(舊制)를 복구하였으나 다만 지성사(知省事)는 두지 않았으며, 도사(都事)는 승격하여 정7품으로 하였다. 11년에 상서성을 혁파하고 다시 삼사를 복구하였다. (『고려사』권76, 지30, 백관1, 상서성)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 국초에 도병마사(都兵馬使)라 칭하였다. 문종대에 관제를 정하여, 판사(判事)는 시중(侍中) 평장사(平章事) 참지정사(參知政事) 정당문학(政堂文學)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로서 임명하고, 사(使)는 육추밀(六樞密) 및 직사(職事) 3품이상으로 임명하고, 부사(副使) 6인은 정4품 이상의 경(卿) 감(監) 시랑(侍郞)으로 임명하고, 판관(判官) 6인은 소경(少卿) 이하로 임명하고, 녹사(錄事) 8인은 갑과(甲科) 권무(權務)로 하였다. 이속(吏屬)은 기사(記事) 12인, 기관(記官) 8인, 서자(書者) 4인, 산사(算士) 1인이 있었다.

충렬왕 5년에 도병마사를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로 고쳤으며, 무릇 큰일이 있으면 사(使) 이상이 회의하였기 때문에 합좌(合坐)의 이름이 있게 되었다. 원을 섬긴 이래로 일이 갑작스러운 것이 많아 첨의(僉議)와 밀직(密直)이 매양 합좌하였다.

공민왕 원년(1352)에 오군(五軍)의 녹사(錄事)로 하여금 도평의사사의 안독(案牘 : 서류)을 관장하게 하였다.

신창(辛昌) 때에 도평의사사의 육색장(六色長)을 이(吏) 예(禮) 호(戶) 형(刑) 병(兵) 공(工)의 육방녹사(六房錄事)로 고쳤고 또 지인(知印) 20명 있었던 것을 나누어서 10명을 지인으로, 10명은 선차(宣差)로 하였는데 선차는 지방에 심부름을 가는 임무를 맡았다. 또 개성(開城)·후덕(厚德)·자혜부(慈惠府)의 판사(判事)들과 윤(尹)들도 모두 도평의사사의 관직을 겸임하게 하였다.

공양왕 2년에 경력사(經歷司)를 더 철치하여 여기서 육방(六房)을 통솔하게 하였다. 경력(經歷) 1명은 품계를 3품 내지 4품으로 하였고, 도사(都事) 1명은 5품 내지 6품으로 하고 모두 문신으로써 임명하였다. 또 각 년의 공거와 잡업으로 벼슬살이 하지 않는 자들을 여기에 소속시켜 전리(典吏)로 하고 그 품계는 7품 내지 8품으로 하여 서사(書寫)를 맡아보게 하였다. 또 문하부 삼사 밀직사의 정원(正員)을 도평의사사의 판사 사가 동판사사 겸사사로 임명하고 그 밖의 상의(商議)들과 개성부(開城府), 예문관(藝文官)의 인원들은 이러한 관직을 겸할 수 없게 하였다. 4년에 각사(各司)의 수품(受)하는 공사(公事)는 모두 도당(都堂)에 직접 보고하고 육조(六曹)에 6조에 예속시키지 않게 하였다. (『고려사』권77, 지31, 백관2, 제사도감각색)

도병마사(都兵馬使)가 아뢰기를, "장군정신용(將軍鄭神勇) 임영함(林英含) 및 군사(軍士) 1만 2,500여인이 모두 변공(邊功)이 있으므로 증급(增級)하여 상주기를 청합니다." 하니, 이를 따랐다. (『고려사』권4, 세가4, 현종 6년 7월)

국제(國制)에 지신사(知申事) 1인, 승선 4인은 관위가 모두 3품에 불과하나 날을 교대로 입직하여 보평청(報平廳)에서 예를 집행하고 왕명을 출납하되 한 마디 말이라도 감히 함부로 할 수 없으니, 이를 용후(龍喉) 또는 내상(內相)이라고도 말하는 것입니다. (『고려사』권43, 세가43, 공민왕 20년 7월)

간관(諫官)이 상언(上言)하기를, " ... 관직을 설하고 직사를 나누는 것은 정해진 제도가 있다. 지금 양부(兩府)의 수8)가 많아 60에 이르고 있다. "

(『고려사절요』권31, 우왕 5년 정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