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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전성기의 삼국


(  admin   2009년 08월 05일   )



























나물 이사금(奈勿尼師今)




37년(392) 정월에 고구려에서 사신을 보내오니 왕은 고구려가 강성한 까닭으로 이찬 대서지(大西知)의 아들인 실성(實聖)을 보내어 볼모로 삼았다.({三國史記}, 新羅本紀 3)





영락(永樂) 6년(396) 병신(丙申)에 호태왕은 몸소 수군을 인솔하여 잔국(殘國)을 토벌하였다. 군대가 소굴에 이르러 남으로 일팔성(壹八城) ... 등을 공격하여 취하니 백잔은 의로움에 복종하지 않고 감히 맞아 싸우는지라, 왕이 위엄을 보이며 크게 노하여 아리수(阿利水)를 건너 군사를 보내 성을 압박하였다. 백잔의 병사가 소굴로 돌아가자 나아가 성을 포위하니 백잔의 왕은 궁핍해져서 남녀 생구(生口) 1천인과 세포(細布) 1천필을 바치고, 무릎을 꿇고 스스로 맹세하기를 ‘지금부터 영원히 노객(奴客)이 되겠습니다’ 라하였다. 태왕은 은혜를 베풀어 깨닫지 못한 허물을 용서해 주고 이후 순종의 성의를 기록하기로 하였다. 이에 58성과 700촌을 얻었으며, 백잔왕의 아우와 대신 10인을 거느리고 군대를 돌려 국도로 돌아왔다.([廣開土王碑], 永樂 6年)




영락 9년(399) 기해에 백잔(百殘)이 맹세를 저버리고 왜와 화통하자, 왕은 남으로 평양을 순시하였다. 그러자 신라가 사신을 보내와 왕에게 고하기를, ‘왜인이 나라 경내에 가득차 성지를 파괴합니다. 이에 노객(奴客)은 신민된 자로서 왕에게 돌아와 명을 청합니다.’라 하였다. 태왕은 은혜와 자비를 내려 그 충성을 칭찬하고 사신을 돌려보내면서 밀계를 알려주었다. 10년 경자(庚子)에 보병과 기병 5만을 파견하여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廣開土王碑], 永樂 9年 10年)




長壽王 63년(475) 9월에 왕이 군사 3만을 이끌고 백제에 침입하여, 백제왕의 도읍인 漢城을 함락시키고 濟王 扶餘慶을 죽이고 남녀 8천인을 사로잡아 돌아왔다.({三國史記}, 高句麗本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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