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림이의 역사 교실 권혁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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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태동기] 

국채보상운동
admin  (2009년 09월 01일 17시51분25초)  



1904년의 고문정치() 이래 일제는 한국의 경제를 파탄에 빠뜨려 일본에 예속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한국정부로 하여금 일본으로부터 차관()을 도입하게 하였고, 통감부는 이 차관을 한국민의 저항을 억압하기 위한 경찰기구의 확장 등 일제침략을 위한 투자와 일본인 거류민을 위한 시설에 충당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1905년 6월에 구채상환() 및 세계보충비()로 도쿄[]에서 200만 원의 공채()를 모집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1907년 한국정부가 짊어진 외채는 총 1,300만 원이나 되었다. 당시 한국정부의 세입액에 비해 세출 부족액은 77만여 원이나 되는 적자예산으로서, 거액의 외채상환은 불가능한 처지였다.


이에 전국민이 주권 수호운동으로 전개한 것이 국채를 상환하여 국권을 회복하자는 것이었다. 이러한 취지로 국채보상운동이 처음 시작된 것은 1907년 2월 대구 광문사()의 명칭을 대동광문회()라 개칭하는 특별회에서 회원인 서상돈()이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하자고 제의, 참석자 전원의 찬성으로 국채보상취지서를 작성 발표하면서부터이다.


발기인은 서상돈을 비롯하여 김광제() ·박해령() 등 16명으로, 이들은 국채보상 모금을 위한 국민대회를 열고, 국채지원금수합사무소()를 설치하여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전국민의 호응으로 서울에서는 김성희() ·유문상() 등이 국채보상기성회()를 설치하여 운동을 본격화했으며,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제국신문()》 《만세보》 등 각종 신문이 후원하여 신문 캠페인을 벌임으로써 적극 지원하였다.


이에 기탁되는 의연금을 보관하고 운동을 추진하기 위한 통합기관의 필요성에 따라 동년 4월 8일 《대한매일신보사》에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를 설치, 한규설() ·양기탁() 등 임원을 선출하였다.


이 운동이 실시된 이후 4월 말까지 보상금을 의연한 사람은 4만여 명이고 5월까지의 보상금액은 230만 원 이상이었다. 이 운동에는 여성들도 적극 참여하였는데,
대구에서는 남일패물폐지부인회() ·국채보상탈환회()가 결성되어 패물을 보상운동에 의연하였으며, 서울에서는 부인감찬회() ·대안동국채보상부인회()가 결성되어 《대한매일신보》에 자발적으로 의연할 것을 게재하는 등 적극적으로 의연금을 모금하였다.


이 외에도 서울여자교육회() ·진명부인회() ·대한부인회 ·원일부인회 등에서 보상금모집소()를 설치하여 활동하였다. 부산에서는 좌천리부인회감선의연회()를 조직하고, 진남포에서는 삼화항패물폐지부인회()를 결성하여 패물을 모아 보상금으로 내놓았다. 당시 사회계층 가운데 최하류층에 속했던 기생들도 국채보상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 진주애국부인회()를 결성하는 등, 서울 ·평양 ·진주 등지에서도 의연금을 모금하였다.


그 외에도 여러 형태의 여성 국채보상운동 단체가 설립되었으며 운동의 영향이 일본에까지 파급되어 유학중인 800여 명의 유학생들도 국채보상운동에 호응하였다.


이와 같이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일제는 이 운동을 극력 탄압 금지하였으며, 송병준() 등이 지휘하던 매국단체인 일진회의 공격과 통감부에서 국채보상기성회의 간사인 양기탁을 보상금 횡령이라는 누명을 씌워 구속하는 등 방해로 인해 더 이상 진전없이 좌절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