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림이의 역사 교실

 

울릉도 독도의 연표
admin  (2011년 05월 26일 13시13분45초)  



245 옛우산국을 말해주는 최초의 사료로 추정되는 삼국지 위지동이전에는 "옥저의 기로가 말하기를 국인이 언젠가 배를 타고 고기잡이를 하다가 바람을 만나 수십일 동안 표류하여 동쪽의 섬에 닿았는데 그 섬에 사람이 살고 있었으나 언어가 통하지 않았고 그들은 해마다 칠월이 되면 소녀를 선택하여 바다에 빠뜨린다"라고 함.


512 (2845, 壬辰) 신라 지증왕 13

6월 신라 하슬라주(何瑟羅州 : 현재 강릉지역) 군주(軍主) 이사부(異斯夫) 우산국(于山國) 정벌. '삼국사기'에는 우산국은 溟州 正東의 海島로 鬱陵島라 불리기도 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삼국유사'에는 같은 기사에 亏陵島(今作羽陵)라 기록되어 있음.
‘三國史記' 권4 新羅本紀 4 智證麻立干 13年條, 권44 列傳 4 異斯夫傳,
'三國遺事' 권 1 紀異 智哲老王條.


930 (3263, 庚寅) 고려 태조 13

8월 우릉도(于陵島)에서 백길과 토두를 보내어 고려에 來朝, 方物을 바쳐옴에 따라 정위(正位)와 정조(正朝)의 관계(官階)를 하사함.
'高麗史' 권1 太祖世家 1.

1018 (3351, 戊午) 고려 현종 9

11월 우산국(于山國)이 동북 여진의 침구를 받고 폐농(廢農)하게 되었으므로, 이원구(李元龜)를 파견하여 농기를 보냄.
'高麗史' 권4 顯宗世家 1.


1019 (3352, 己未) 고려 현종 10

7월 여진의 침구로 인해 본토로 도망와 있던 우산국 사람들(于山國民戶)을 모두 돌려보내려 함.
'高麗史' 권4 顯宗世家 1.


1022 (3355, 壬戌) 고려 현종 13

7월 여진의 침구를 피해 본토로 도망와 있던 우산국사람(于山國民)들을 예주(禮州 : 지금의 영덕군지역, 혹은 당시 평해·영덕·영양 등지를 관할하는 지방행정 조직체 防禦使 禮州의 管內)에 정착하게 함.
'高麗史' 권4 顯宗世家 2.


1032 (3365, 壬申) 고려 덕종 1

11월 우릉성주(羽陵城主)가 아들 夫於仍多郞을 보내 來朝, 土物을 바침.
'高麗史' 권5 德宗世家.


1141 (3474, 辛酉) 고려 인종 19

7월 명주도 감창사(溟州道監倉使) 이양실(李陽實)이 울릉도(蔚陵島)로 사람을 들여 보내 특이한 菓核과 木葉을 채취하여 바침 .
'高麗史' 권17 仁宗世家 3.


1157 (3490, 丁丑) 고려 의종 11

5월 우릉도(羽陵島)에 주민을 이주시키려 명주도감창 전중내급사(溟州道監倉 殿中內給事) 김유립(金柔立)을 보내 조사케 하였으나, 암석이 많아 거주가 어렵다 하여 의논을 중지함.
'高麗史' 권18 毅宗世家 2.


1197  증보문헌비고, 여지지

1219  울진 현령 박순이 처와 노비, 재산을 배에 싣고 울릉도에 가려 다 주민들에게 발각됨.


1243 (3576, 癸卯) 고려 고종 30

대몽항쟁 중 최이(崔怡)에 의해 울릉도(蔚陵島)에 주민을 이주시킴. 후에 익사자가 많이 생겼으므로, 이주 정책은 중지됨.
'高麗史' 권129 列傳 叛逆 3 崔忠獻 附 崔怡傳

1246 (3579, 丙午) 고려 고종 33

5월 국학 학유(國學學諭) 권형윤(權衡允)과 급제(及第) 사정순(史挺純)이 울릉도 안무사(蔚陵島 安撫使)로 임명됨.
'高麗史' 권23 高宗世家 2.

1253  이승휴는 몽고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삼척 요전산성을 수비하고 있던 중 산성에서 동해 중에 무릉도(울릉도)를 관망함.

1273 (3606, 癸酉) 고려 원종 14

元이 李樞를 파견하여 大木을 요구하였으므로, 2월 첨서추밀원사(簽書樞密院事) 허공(許珙)을 울릉도 작목사(蔚陵島 斫木使)로 임명해 함께 가게 함. 벌목은 고려의 요청에 의해 곧 중지됨.
'高麗史' 권27 元宗世家 3, 권130 列傳 叛逆 4 趙彝 附 李樞傳.


1346 (3679, 丙戌) 고려 충목왕 2

동계(東界)의 우릉도인(芋陵島人)이 來朝함.
'高麗史' 권37 忠穆王世家.


1379 (3712, 己未) 고려 우왕 5

7월 倭가 무릉도(武陵島)에 들어와 보름동안 머물다가 물러감.
'高麗史' 권134 叛逆 6 辛禑 1.

1403 (3736, 癸未) 조선 태종 3

8월 (강릉도)관찰사의 장계를 따라 강릉도 무릉도(江陵道 武陵島) 거주민을 육지로 나오게 함.
'太宗實錄' 권6.

1407 (3740, 丁亥) 조선 태종 7

3월 대마도 수호(對馬島守護) 종정무(宗貞茂)가 잡혀간 사람들을 송환하고 토물(土物)을 바치며 무릉도(武陵島)에 옮겨 살기를 청하였으나 거절함.'太宗實錄' 권13.


1416 (3749, 丙申) 조선 태종 16

9월 삼척사람 전만호(三陟人 前萬戶) 김인우(金麟雨)를 무릉 등지의 안무사(武陵等處 安撫使)로 임명하여 거주민을 쇄환하게 함.
'太宗實錄' 권32.


1417 (3750, 丁酉) 조선 태종 17

2월 김인우(金麟雨)가 우산도(于山島)에서 토산물과 주민 3명을 데리고 돌아와 섬에는 15호 86명이 거주하고 있다고 보고함. 우산·무릉도(于山武陵)에 주민의 거주를 금하고 거주민을 쇄출하기로 최종결정되므로써 수토정책(搜討政策)이 확립됨.
8월 왜가 우산 무릉(于山武陵)을 노략함.
'太宗實錄' 권33, 34..

1425 (3758, 乙巳) 조선 세종 7

10월 우산 무릉 등지의 안무사(于山武陵等處按撫使) 김인우(金麟雨)가 남녀 20명을 잡아오니, 충청도의 깊은 山郡에 정착시키고 3년간 세금을 면재해 주기로 함.
'世宗實錄' 권30.


1429 (3762, 己酉) 조선 세종 11

12월 봉상시 윤(奉常寺尹) 이안경(李安敬)을 강원도에 보내어 요도(蓼島)에 대해서 살펴보게 함.
'世宗實錄' 권46.

1430 (3763, 庚戌) 조선 세종 12

1월 봉상시 윤(奉常寺尹) 이안경(李安敬)이 요도(蓼島)에 대해서 살펴보고 돌아오니, 함길도 관찰사에게 요도(蓼島)의 지형과 주민의 생활에 대해서 조사하게 함.
4월 상호군(上護軍) 홍사석(洪師錫)과 전농 윤(典農尹) 신인손(辛引孫)을 각각 강원도와 함길도에 보내어 요도(寥島)를 찾아보게 함.
'世宗實錄' 권47, 48.


1432 (3765, 壬子) 조선 세종 14

'신찬팔도지리지(新撰八道地理志)'가 편찬되었는데, '강원도 삼척도호부 울진현조'에 “우산(于山), 무릉(武陵) 두 섬의 정동쪽 바다에 있는데, 두 섬은 서로 거리가 멀지 않아 날씨가 맑으면 바라볼 수 있다. …”라고 기록함. 이 내용은 1454년(단종 2)에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에 그대로 실리게 됨.
'世宗實錄' 권153 '地理志' 江原道 三陟都護府 蔚珍縣條.



1436 (3769, 丙辰) 조선 세종 18

윤6월 강원도 관찰사 유계문(柳季聞)이 무릉도 우산(武陵島牛山)에 주민을 모으고 만호(萬戶)와 수령(守令)을 설치하자고 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음.
'世宗實錄' 권73.


1438 (3771, 戊午) 조선 세종 20

4월 전 호군(前護軍) 남회(南薈)와 전 부사직(前副司直) 조민(曹敏)을 무릉도순심경차관(茂陵島巡審敬差官)으로 임명 함. 7월 남회와 조민은 남녀 66명과 토산물을 가지고 돌아옴.
'世宗實錄' 권81, 82.

1438 (3771, 戊午) 조선 세종 20

7월 강원도 관찰사에게 요도(蓼島)의 위치를 다시 조사하게 함.
'世宗實錄' 권82.


1445 (3778, 乙丑) 조선 세종 27

8월 강원도 관찰사에게 요도(蓼島)를 찾는 자에게 포상할 것을 명하고, 또 남회(南薈)를 보내 찾게 했으나 끝내 실패함.
'世宗實錄' 권82.

1451 (3784, 辛未) 조선 문종 1

이해에 '고려사'가 편찬되었는데, '地理志' 동계 울진현조에 “울릉도(鬱陵島)는 현의 정동쪽 바다가운데 있다. … 일설에는 우산(于山)무릉(武陵)은 원래 두개의 섬으로 서로 거리가 멀지 않아 날씨가 맑으면 바라볼 수 있다고 한다”라고 기록 하였음.
'高麗史' 권58 地理3 東界 蔚珍縣條.


1454  세종실록지리지에 "땅이 비옥하고 대나무의 크기가 기둥같으며 쥐는 고양이 같고, 복숭아씨가 되처럼 큰  데 모든 물건이 이와 같다."고기록되어 있음.


1469  삼봉도로 호칭

1472 (3805, 壬辰) 조선 성종 3

2월 兵曹에서 강원도의 삼봉도(三峯島)를 찾기 위한 節目을 올림. 4월 삼봉도 경차관(三峯島敬差官) 박종원(朴宗元)이 하직함.

6월 강원도 관찰사가 馳啓하기를 5월 28일 울진포를 출발한 박종원 일행이 大風을 만나서 박종원이 탄 배는 6월 6일 간성군으로 돌아왔고, 사직 (司直) 곽영강(郭永江) 등 나머지 3척은 5월 29일 무릉도(武陵島)에 도착하여 섬을 수색하고 6월 6일 강릉 우계현(羽溪縣)으로 돌아왔다고 함.
'成宗實錄' 권15, 17, 19.

1473 (3806, 癸巳) 조선 성종 4

1월 영안도 관찰사 정난종(鄭蘭宗)에게 삼봉도(三峯島)와 요도(蓼島)에 대해서 조사하게 함.
'成宗實錄' 권26.

1476 (3809, 丙申) 조선 성종 7

6월 김한경(金漢京) 등이 삼봉도(三峯島)에 다녀온 적이 있다고 하므로, 영안도 관찰사 이극균(李克均)에게 사람을 보내 수색해 보게 함.

10월 영안도 관찰사가 보낸 김자주(金自周)가 9월 삼봉도를 보고 형상을 그려옴.
'成宗實錄' 권72.

1479 (3812, 己亥) 조선 성종 10

윤10월 영안도 경차관(永安道敬差官) 조위(曹偉)가 김한경(金漢京), 김자주(金自周) 등 21명을 10월 27일 삼봉도(三峯島)로 들여보냈음을 보고함. 이들은 삼봉도를 찾지 못하고 돌아옴.
'成宗實錄' 권110.

1480 (3813, 庚子) 조선 성종 11

2월 삼봉도 초무사(三峯島招撫使)의 직책을 피하려 한 상호군(上護軍) 정석희(鄭錫禧)와 훈련원 부정(訓鍊院副正) 박종원(朴宗元)을 귀양 보냄. 5월 삼봉도 초무사(三峯島招撫使) 심안인(沈安仁)에게 삼봉도(三峯島) 행차를 중지하게 함.
'成宗實錄' 권114, 권117.


1481 (3814, 丁丑) 조선 성종 12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을 편찬 하였는데, '강원도 울진현 산천조'에 “우산도(于山島), 울릉도(鬱陵島)(혹은 무릉(武陵), 우릉(羽陵)) 두 섬은 현 정동쪽 바다에 있는데 날씨가 맑으면 나무 등을 볼 수 있고, 바람이 편하면 2일만에 도착할 수 있다. 일설에 의하면 우산 · 울릉이 원래 하나의 섬이라고도 한다. …”라고 하였음. 이 내용은 1530년(중종 25)에 완성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그대로 전재되었음.
'新增東國輿地勝覽' 권45 江原道 蔚珍縣 山川條.


1511 강원도 관찰사에게 무릉도(울릉도)를 살피게 함.



1531  신증동국여지승람 팔도총도


1614 (3947, 甲寅) 조선 광해군 6

6월 對馬島主가 울릉도를 의죽도(礒竹島)라 칭하며 섬의 지형을 살피고자 하니 길을 안내해 달라고 청하였기에 이를 거부함.
9월 대마도주가 울릉도(鬱陵島) 거주를 청하니 다시 불가함을 알림.
光海君日記 권82, 邊例集要 권17 雜條 附 鬱陵島.


1618  일본 무라까와, 오타니 두 가문 불법 울릉도 출어, 벌목채취시작


1667  齋藤豊仙의 은주시청합기(隱州視聽合記)


1693 (4026, 癸酉) 조선 숙종 19

안용복(安龍福) 1차 渡日. 3월 동래와 울산의 어부 40여명이 울릉도에서 일본 어부와 충돌했는데, 일본인들이 안용복과 박어둔(朴於屯)을 꾀어 隱岐島로 납치함. 안용복은 隱岐島主에게 자신들을 잡아온 이유를 따지고, 다시 伯耆州 太守를 만나 울릉도는 조선의 영토이므로 일본인의 울릉도 왕래를 금해줄 것을 요구함. 백기주 태수는 막부에 보고하고, 이를 준수하겠다는 書契를 안용복에게 전달함.
肅宗實錄 권26, 30, 邊例集要 권17 雜條 附 鬱陵島, 五洲衍文長箋散稿 권35 「陵島事實辨證說」, 旅菴全書 권7 疆界


1693 (4026, 癸酉) 조선 숙종 19

11월 대마도주가 안용복과 박어둔을 일본영토를 침입했다는 죄명을 씌워 조선으로 송환함. 대마도주는 울릉도를 죽도(竹島)라 칭하고 죽도는 일본땅이므로 조선인의 출입을 막아달라는 書契를 함께 보냄.
12월 接慰官 홍중하(洪重夏)가 東萊 倭館으로 내려와 倭使 橘眞重을 만남
肅宗實錄 권26, 邊例集要 권17 雜條 附 鬱陵島, 五洲衍文長箋散稿 권35 「陵島事實辨證說」, 旅菴全書 권7 疆界考.

1694 (4027, 甲戌) 조선 숙종 20

2월 接慰官 홍중하(洪重夏) “울릉도는 조선의 영토이며, 죽도는 일본의 영토”라는 조정의 回書를 倭使 橘眞重에게 전달함. 왜사가 회서에서 울릉도를 삭제해 달라고 청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음.
7월 전 무겸 선전관(前武兼宣傳官) 성초형(成楚珩)이 울릉도에 鎭을 설치하자고 건의 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음.
肅宗實錄 권26, 邊例集要 권17 雜條 附 鬱陵島. 肅宗實錄 권27.

1694 (4027, 甲戌) 조선 숙종 20

8월 대마도의 왜사 귤진중이 2월에 받아간 회답서계를 가지고 와서, 울릉도에 관한 문구의 삭제를 다시 요청함. 조정에서는 일본의 간계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기로 함. 이에 이미 보낸 회서의 내용을 고치기로 하고 유집일(兪集一)을 접위관으로 임명하여 동래 왜관으로 내려보내는 한편, 장한상(張漢相)을 삼척첨사(三陟僉使)로 삼아 울릉도로 파견하여 사정을 살펴보게 함.
유집일은 안용복으로 부터 실상을 알아낸 후, 왜사를 꾸짖고 “울릉도와 죽도는 하나의 섬에 붙여진 두 이름이며, 울릉도는 조선의 영토”라는 내용의 2차 회서를 전달함. 장한상은 9월 19에 출발하여 10월 6일에 삼척으로 돌아왔는데, 水路의 불편으로 주민의 거주보다는 정기적으로 수토관(搜討官)을 파견하기로 함. 한편 장한상은 육안으로 울릉도 동남방에 있는 독도를 관망함.
肅宗實錄 권27, 邊例集要 권17 雜條 附 鬱陵島, 蔚陵島事蹟.

1695  자산군수 이준명이 삼척첨사 당시 울릉도의 순찰을 회피한 이유로 관직을 파면함.


1696 (4029, 丙子) 조선 숙종 22

1월 일본막부 일본인의 울릉도 도항 금지를 결정함.
8월 안용복(安龍福) 2차 渡日. 재차 일본에 가서 울릉도문제를 담판짓고, 강원도 양양현(襄陽縣)으로 돌아온 안용복을 잡아 가둠. 안용복은 평산포(平山浦) 사람 이인성(李仁成) 등과 함께 울릉도와 독도(子山島-于山島)를 거쳐 일본 백기주로 들어가 울릉 자산 양도 감세(鬱陵子山兩島監稅)라 가칭하고, 태수에게 전일의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을 따짐. 백기주 태수는 울릉도․독도지역을 침범한 일본인들을 처벌하였고, 안용복에게 “두 섬은 이미 조선에 속했고, 다시 침범하는 자가 있거나, 대마도주가 함부로 침범할 경우 엄벌에 처하겠다”고 약속 함. 안용복은 막부에 대한 상소를 취하 하고 강원도로 돌아옴.
肅宗實錄 권30.


1697 (4030, 丁丑) 조선 숙종 23

1월 대마도에서 倭使가 와서 幕府 關白의 명으로 竹島를 조선의 영토로 인정하고 일본인의 출입을 금하였음을 알려옴.
3월 안용복의 공을 인정하여 사형시키지 않고, 귀양 보냄.
4월 3년에 1번씩 울릉도에 搜討官을 파견하기로 함.
肅宗實錄 권31, 承政院日記 肅宗 23年 4月 13日條, 邊例集要 권17 雜條 附 鬱陵島.


1699 (4032, 己卯) 조선 숙종 25

7월 강원도 월송만호(越松萬戶) 전회일(田會一)이 울릉도(鬱陵島)를 수토하고 지도와 토산물을 바침. 숙종 24년에 영동지방의 흉년으로 수토관을 파견하지 못했으므로 3년 1회 수토가 정식화 된 후 처음으로 파견된 것임.
肅宗實錄 권33.


1702 (4035, 壬午) 조선 숙종 28

5월 삼척영장(三陟營將) 이준명(李浚明)이 울릉도(鬱陵島)를 수토하고 지도와 토산물을 바침.
肅宗實錄 권36.


1705 (4038, 乙酉) 조선 숙종 31

6월 울릉도(鬱陵島) 수토 후 돌아오는 길에 平海 등의 軍官 黃仁建 등 16명이 익사한데 대해 恤典을 거행함.
肅宗實錄 권42.


1708 (4041, 戊子) 조선 숙종 34

2월 부사직(副司直) 김만채(金萬埰)가 울릉도(鬱陵島)에 진(鎭)을 설치하자고 상소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음.
肅宗實錄 권46.

1711  삼척영장 박석창이 울릉도를 수토함.




1714  강원도 어사 조석명은 무자년(1708), 임진년(1712) 왜선이 강원도 고성에 표류하여 온것들 들어 해안방어를 강화하고자 건의함

1717 (4050, 丁酉) 조선 숙종 43

3월 강원도 관찰사 이만견(李晩堅)이 흉년을 이유로 당해의 울릉도(鬱陵島) 搜討를 정지하자는 장계를 올려 받아들임.
肅宗實錄 권59


1726 (4059, 丙午) 조선 영조 2

10월 강원도 儒生 이승수(李昇粹)가 울릉도(鬱陵島)에 邊將을 두고 주민을 모아 경작하게 하자고 상소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음.
英祖實錄 권1.

1735 (4068, 乙卯) 조선 영조 11

1월 강원도 관찰사 조최수(趙最壽)가 흉년을 이유로 당해의 울릉도(鬱陵島) 수토를 정지할 것을 건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음.
英祖實錄 권40.

1769 (4102, 己丑) 조선 영조 45

10월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의 울릉도에서 산삼을 몰래 채취하는 것을 예로 들어 울릉도의 문적을 만들기를 건의함. 제조 원인손(元仁孫)에게 명하여 삼척영장을 지낸 자와 더불어 울릉도의 지형과 물산을 그리게 함.
英祖實錄 권113.

1775 (4108, 乙未) 조선 영조 51

일본 최초로 경위도선을 그려 넣은 나가쿠보 세키스이(長久保赤水)의 일본여지노정전도(日本輿地路程全圖)에 울릉도와 독도가 각각 '다케시마 혹은 이소다케시마(竹島一云磯竹島)', '마츠시마(松島)'로 그려졌다. 울릉도 오른 쪽에 "(이 섬에서) 고려를 보는 것이 이즈모에서 오키도를 보는 것 같다(見高麗猶雲州望隱州)"고 부기하여, 두 섬을 조선의 영토로 구분함.
日本輿地路程全圖

1785 (4118, 乙巳) 조선 정조 9

일본의 하야시 시헤이(林子平)가 저술한 三國通覽圖說의 附圖 「三國接壤地圖」와 「朝鮮八道地圖」에서 울릉도와 독도를 조선의 영토로 표기함.
三國通覽圖說

1787 (4120, 丁未) 조선 정조 11

7월 울산어부 14명이 울릉도(鬱陵島)에서 전복과 향나무, 대나무 등을 채취하고 돌아오다가 삼척 포구에서 잡힘.
正祖實錄 권24.


1794 (4127, 甲寅) 조선 정조 18

6월 강원도 관찰사 심진현(沈晉賢)이 울릉도 수토결과를 보고함. 搜討官 월송만호(越松萬戶) 한창국(韓昌國)은 4월 21일 출발하여 5월 8일에 돌아옴. 그는 4월 26일 가지도(可支島)를 다녀옴.
正祖實錄 권40.


1831 삼척영장 이경정이 울릉도를 수토함.


1847  삼척영장 정재천이 울릉도를 수토함.

1848 (4181, 戊申) 조선 헌종 14

4월 17일 미국 포경선 체러키(Cheroke)호가 독도를 발견함(북위 37도 25분, 동경 132도 00분).
포경선 체러키호 항해일지


1849 (4182, 己酉) 조선 헌종 15

1월 27일 프랑스 포경선 리앙꼬르(Liancourt)호가 독도를 발견(북위 37도 2분, 동경 131도 46분)하여 Liancourt Rocks으로 명명함. 이 사실이 프랑스 해군 수로지와 海圖에 실림으로써 서양에 알려지게 됨.
3월 18일 미국 포경선 윌리암 톰슨(William Thompson)호가 독도를 발견(북위 37도 19분, 동경 133도 9분), “세개의 바위(3 rocks)를 보았다”고 기록함. 이는 조선 성종조의 삼봉도(三峯島)를 상기시키는 대목임.
포경선 윌리암 톰슨호 항해일지


1854 (4187, 甲寅) 조선 철종 5

4월 6일(러시아 구력) 푸쟈친 제독이 지휘하는 러시아 극동 원정대 4척 중 하나인 올리부차호가 마닐라에서 타타르 해협으로 향하던 중 독도를 발견함. 서도는 섬을 발견한 함정의 이름을 따서 ‘올리부차’로, 동도는 올리부차호의 최초 함정 이름이었던 ‘메넬라이’로 명명되었고, 두 섬은 조선의 영토로 파악됨. 독도에 관한 울리부차호의 탐사내용은 바스토크호의 울릉도 관측내용 및 팔라다호의 조선 동해안 측량내용과 함께 러시아 海軍誌 1855년 1월 호에 실려 1857년 러시아 해군이 작성한 「조선동해안도」의 기초자료가 됨.
올리부차호 항해일지(1854), 러시아 해군지(1855), 일본 해군성 수로국의 「조선동해안도(朝鮮東海岸圖)」(1876).

1855 (4188, 乙卯) 조선 철종 6

4월 25일 영국함대가 독도를 발견, 함정 이름을 따서 호넷(Hornet)으로 명명함.
영국의 수로잡지(Nautical Magazine)(1856), 프랑스 해군성의 수로지(1856년판, 제11권)


1870 (4203, 庚午) 조선 고종 7

1869년 12월 조선에 밀파된 일본외무성 관리들이 귀국하여 1870년 4월 복명서 '조선국교제시말내탐서(朝鮮國交際始末內探書)'를 제출함. 이 복명서에는 ‘竹島(울릉도)와 松島(독도)가 조선의 영토로 되어 있는 始末’을 조사한 내용이 실려 있음.
朝鮮國交際始末內探書

1875 (4208, 乙亥) 조선 고종 12

11월 일본육군 參謀局이 朝鮮全圖를 작성, 이 지도에는 독도가 松島로 표기되어 실림으로써, 독도를 竹島(울릉도)와 함께 한국영토로 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일본육군 參謀局의 朝鮮全圖

1876 (4209, 丙子) 조선 고종 13

일본 해군 「朝鮮東海岸圖」를 작성함. 이 지도는 1857년 러시아 해군이 제작한 지도를 저본으로 하여 재발행 작전지도인데, 독도를 울릉도와 함께 조선의 부속도서로 표기하였음.
10월 16일 일본 국토의 地籍을 조사하고 근대적 地圖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시마네현에서 내무성으로 죽도(울릉도)와 송도(독도)를 시마네현 지도에 포함시키는지의 여부를 내무성에 질의. 내무성은 이에 대하여 약 5개월간에 걸쳐 시마네현에서 올라온 부속문서와 원록연간 안용복사건을 계기로 조선과 교섭한 관계문서들을 모두 조사해 본 후, 죽도와 송도는 조선의 영토로 일본과는 관계가 없다는 결정을 내림.
武藤平學 송도개척지의(松島開拓之議)를 일본 외무성에 제출, 해군성이 1878년 4월과 9월 군함 天城丸을 파견, 송도의 실체에 대해 조사결과 송도가 조선의 ‘울릉도’로 판명되어 무등의 송도개척지의(松島開拓之議) 각하됨.
「朝鮮東海岸圖」(일본해군성 수로국, 1876)

1877 (4210, 丁丑) 조선 고종 14

3월 17일 내무성은 죽도(울릉도)외 1도(송도-독도)가 일본과 상관없지만, “판도의 취사는 중대한 사건”이라는 이유로 국가최고기관 太政官에게 질품서를 부속문서들과 함께 올려 최종결정을 요청함.
3월 20일 일본국가최고기관인 太政官은 “품의한 취지의 竹島外一島의 件에 대하여 本邦은 관계가 없다는 것을 心得할 것”이라는 지령문을 작성. 3월 29일 내무성으로 지령문을 보냄.
4월 9일 일본 내무성은 태정관의 지령문을 시마네현으로 보냄.
公文錄 內務省之部 1.

1881 (4214, 辛巳) 조선 고종 18

울릉도(鬱陵島)에 일본인 7명이 잠입하여 벌목하다가 搜討官에게 발견되었으므로, 강원도 관찰사 임한수(林翰洙)가 馳啓하여 대비책을 강구할 것을 청함. 5월 22일 統理機務衙門의 啓言에 따라 이에 대한 書契를 일본 외무성에 보내게 하고, 부호군 이규원(副護軍 李奎遠)을 울릉도 검찰사(鬱陵島檢察使)에 임명함.
承政院日記 高宗 18年 5月 22日條, 日省錄 高宗 18年 5月 22日條, 高宗實錄 권18.

1881 (4214, 辛巳) 조선 고종 18

7월 일본 北澤正誠 '竹島考證'을 작성하고 이를 요약한 '竹島版圖所屬考'를 일본 외무성에 제출함. 일본은 1880년 군함 天成을 울릉도에 파견하여 현지조사를 하는 한편, 北澤正誠으로 하여금 울릉도, 독도의 역사와 관련자료를 조사하게 하였음. 이 보고서는 지금의 松島는 元祿 12년(1699)의 竹島 즉, 울릉도로서 일본영토가 아니라고 결론 내림. 그리고, <참고>항에 “울릉도 외에 죽도가 또 있지만, 아주 작은 小島에 불과한 것”이라 하여 독도에 관한 내용을 부가함.
竹島考證(上中下), 竹島版圖所屬考

1882 (4215, 壬午) 조선 고종 19

4월 7일 울릉도 검찰사(鬱陵島檢察使) 이규원(李奎遠)이 하직함. 高宗은 울릉도(鬱陵島) 근방에 있다는 芋山島와 松島 竹島에 대해서 특별히 잘 살피고, 울릉도에 고을을 설치하기 위해서 地圖와 별도의 보고서(別單)를 상세히 작성할 것을 당부함.
承政院日記 高宗 19年 4月 7日條, 日省錄 高宗 19年 4月 7日條, 高宗實錄 권19.

1882 (4215, 壬午) 조선 고종 19

6월 5일 울릉도검찰사 이규원이 복명함. 그는 4월 30일 울릉도에 도착하여 5월 2일부터 10일까지 조사한 뒤 13일 평해 구산포(平海 邱山浦)로 돌아왔음. 그는 設邑이 가능하며, 羅里洞이 적합하다고 건의함. 또한 조사과정에서 일본인들이 나무를 도벌하고, 標木을 세워 松島라고 하고있는 것을 적발하였므로, 이를 일본공사와 외무성에 항의 하기로 함.
承政院日記 高宗 19年 6月 5日條, 日省錄 高宗 19年 6月 5日條, 高宗實錄 권19, 李奎遠의 鬱陵島檢察日記 「啓本草」


1882 (4215, 壬午) 조선 고종 19

8월 20일 영의정 홍순목(洪淳穆)의 啓言에 따라, 鬱陵島에 島長을 差送케 함. 검찰사 이규원의 건의에 따라 울릉도에 거주하고 있던 함양사람 전석규(全錫奎)를 島長에 임명함.
承政院日記 高宗 19年 8月 20日條, 備邊司謄錄 高宗 19年 8月 20日條, 高宗實錄 권19, 李奎遠의 鬱陵島檢察日記.


1883 (4216, 癸未) 조선 고종 20

3월 16일 김옥균(金玉均)이 동남제도개척사 겸 포경등사사(東南諸島開拓使兼捕鯨等事使)로 임명됨.
高宗實錄 권20, 21.

1883 (4216, 癸未) 조선 고종 20

4월 일본해군수로국 '환영수로지(寰瀛水路誌)'를 발간함. 제2권 「조선국일반정세」에서 독도(リヤコ-ルト 列岩)를 소개함으로써, 독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스스로 밝힘.
寰瀛水路誌 第2卷(日本 海軍水路局, 1883. 4).


1883 (4216, 癸未) 조선 고종 20

4월 울릉도에 첫 이주민 16호 54명이 들어옴.
7월 조선 정부에서 울릉도에 들어온 첫 이주민의 정착상황을 조사함.
「光緖 9年 4月 日 鬱陵島開拓時船格糧米雜物容入假量成冊」, 「光緖 9年 7月 日 江原道鬱陵島新入民戶人口姓


1884 (4217, 甲申) 조선 고종 21

1월 11일 동남제도개척사 김옥균이 울릉도장 전석규(鬱陵島長 全錫奎)가 일본인과 담합하여 울릉도의 목재를 일본으로 반출시키고 있다고 장계함에 따라 전석규를 압송하기로 함.
承政院日記 高宗 21年 1月 11日條, 日省錄 高宗 21年 1月 11日條, 備邊司謄錄 高宗 21年 1月 6日, 11日條, 高宗實錄 권21.

1884 (4217, 甲申) 조선 고종 21

3월 15일 통리군국사무아문(統理軍國事務衙門)에서 울릉도(鬱陵島) 재개척에 있어 먼저 官守를 설치하고 그 후에 백성을 모집하여 땅을 개간하자고 啓언함에 따라 강원도 관찰사로 하여금 조처하게 하고 삼척영장으로 하여금 울릉도첨사를 겸하게 함(職名 : 鬱陵島僉使兼三陟營將).
6월 30일 통리군국사무아문(統理軍國事務衙門)의 啓에 따라 평해군수(平海郡守)가 울릉도첨사(鬱陵島僉使)를 겸하게 함.
承政院日記 高宗 21年 3月 15日條, 日省錄 高宗 21年 3月 15日條, 6月 30日條, 高宗實錄 권21.

1888 (4221, 戊子) 조선 고종 25

2월 6일 내무부(內務府)의 계청에 따라 울릉도에 도장을 다시 설치하고 평해군 월송포에 만호진을 신설하고 월송진 만호(平海郡越松鎭萬戶)로 하여금 울릉도장(鬱陵島長)을 겸임하게 하고, 왕래하며 검찰케 함.
承政院日記 高宗 25年 2月 7日條, 日省錄 高宗 25年 2月 7日條, 高宗實錄 권25. 2월 6일條.

1894 (4227, 甲午) 조선 고종 31

12월 27일 울릉도가 이미 개척되었으므로, 수토에 필요한 자원의 조달을 위한 ‘鬱陵島搜討船格什物’을 영구히 혁파함.
高宗實錄 권32 12월 27일條, 官報 開國503년(1894, 甲午) 12월 27일.

1895 (4228, 乙未) 조선 고종 32, 개국 504

1월 29일 울릉도 수토정책(鬱陵島 搜討定策)이 이미 철훼되었으므로, 내무대신(內務大臣) 박영효(朴泳孝)의 上奏에 의해 월송만호(越松萬戶)가 겸하고 있던 울릉도장(鬱陵島長)을 별도로 임명하고, 매년 수차례 배를 보내어 島民의 疾苦를 살피게 함.
8월 16일 내부대신(內部大臣) 박정양(朴定陽)의 주청에 따라 울릉도(鬱陵島)에 도장(島長)대신 도감(島監)을 設置하기로 함.
9월 20일 울릉도 사람 배계주(裵季周)를 울릉도감(鬱陵島監)으로 정하고, 판임관(判任官) 대우를 하기로 함.
承政院日記 高宗 32年 1月 29日條, 日省錄 高宗 32年 1月 29日條, 高宗實錄 권33, 官報 開國 504年 1月 29日. 제139호 開國 504

1898 (4231, 戊戌) 대한제국 광무 2

5월 30일 칙령 제12호(5월 26일)로 울릉도감(鬱陵島監) 설치를 반포함. 島監은 本土人으로 임명하고, 판임관(判任官) 대우를 함.
高宗實錄 권37, 官報 제962호 光武 2年 5月 30日.


1899 (4232, 己亥) 대한제국 광무 3

12월 19일 일본인의 도벌과 횡포가 계속되므로, 내부대신(內部大臣) 이건하(李乾夏)의 주청으로 울릉도(鬱陵島)에 시찰위원(視察委員)을 파견하기로 함. 시찰위원에는 우용정(禹用鼎)이 임명됨.
高宗實錄 권39, 官報 제1448호 光武 3年 12月 19日. 


1900 (4233, 庚子) 대한제국 광무 4

5월 31일 울릉도시찰위원 우용정과 부산 주재 일본영사관보 적총정보(釜山駐在日本領事館補 赤塚正補) 등 한․일 양국의 조사단이 울릉도에 도착하여, 6월 5일까지 일본인의 비행과 재목 도벌 및 세금징수 여부에 대해 조사하고, 島內의 實情과 島勢를 파악함.
6월 15일 우용정이 돌아와 보고서를 제출하고, 일본인의 조속한 철수와 울릉도 官制의 개편을 건의함.
10월 27일 칙령 제 41호(10월 25일)를 반포하여 울릉도(鬱陵島)를 울도(鬱島)로 개칭하고, 도감(島監)을 군수(郡守)로 바꾸므로써, 강원도의 27번째 郡으로 지방관제(地方官制)에 편입됨. 칙령에 의하면 군청의 위치는 태하동(台霞洞)으로 하고, 울도군수(鬱島郡守)의 관할구역은 鬱陵全島와 竹島(댓섬), 石島(독도)로 함.
도감을 군수로 개정하였으므로, 현임도감 배계주(裵季周)가 초대군수가 되었으며, 울릉군을 南面과 北面으로 나눔에 따라 독도는 울릉군 남면에 속하게 됨.
禹用鼎의 鬱島記와 보고서, 高宗實錄 권40, 官報 제1716호 光武 4年 10月 27日.


1903   울릉도 - 2대 심홍택군수가 취임


1904 (4237, 甲辰) 대한제국 광무 8

2월 10일 일본 러시아에 선전포고.
2월 23일 「제1차 韓日議定書」 강제조인. 이로써 일본은 러일전쟁을 위해 한국영토를 임의로 점령, 사용할 수 있게 됨.
8월 22일 「제1차 한일협약」 강제조인. 일본 대한제국의 정부내에 재정과 외교고문을 설치함.
9월 1일 러시아함대의 감시를 위해 울릉도에 설치한 망루(동남, 동북 2곳, 배원(용인 포함) 각 7명)가 준공됨(9월 2일 업무개시).
9월 24일 독도에 망루설치가 가능한지 조사하기 위해 일본군함 新高가 울릉도를 출발. 新高號는 독도에 대해 “리앙꼬루도岩은 韓人은 이를 獨島라고 書하고 本邦 漁夫들은 양고島라고 호칭”하며, 망루설치가 가능하다는 보고서를 작성함.
9월 29일 일본 어민 中井養三郞 “독도를 일본영토에 편입하고, 자신에게 빌려달라”는 「리앙꼬島領土編入並貸下願」을 외무성, 내무성, 농상무성에 제출함.
11월 20일 독도가 한일간을 연결하는 해저전선의 중계지로 電信所 설치에 적합한지를 조사하기 위해 일본군함 對馬가 독도에 도착함.
官報 號外 光武 8年 3月 8日, 極秘明治三十七八年海戰史, 軍艦新高戰時日誌, 島根縣誌(1923), 隱岐島誌(1933), 軍艦對馬戰時日誌

1905 (4238, 乙巳) 대한제국 광무 9

1월 28일 일본 閣議에서 中井養三郞의 청원을 받아들이는 형식을 빌려 “독도는 주인없는 무인도(無主地)로서, 다케시마(竹島)라 칭하고 일본 島根縣 隱岐島司의 관할하에 둔다”고 일방적으로 결정함.
2월 22일 일본 소위 「시마네현(島根縣)고시 40호」를 날조하여 국제법상 無主地先占에 있어 ‘영토취득의 국가 의사’라는 요건을 모두 충족시켰다는 합법성를 가장하려 함. 이 고시는 실제 고시되었다는 증거가 없음.
5월 17일 일본 독도를 官有地로서 시마네현 토지대장에 등재함.
6월 13일 일본군함 橋立號가 독도의 망루 설치 방법에 대해 조사하고 돌아감.
7월 16일 울릉도 북망루 준공(8월 16일부터 업무 개시, 배원(용인포함) 11명).
8월 19일 일본 독도 망루 준공(준공일부터 업무 개시, 배원 4, 용인 2명).
9월 5일 러일강화조약(포츠머드조약) 체결, 한국에서의 일본의 특수권익이 열강에 의해 인정됨.
10월 8일 울릉도 북망루와 독도 망루 사이에 해저전선 부설.
11월 9일 독도와 일본 시마네현 마쯔에(島根縣 松江) 사이에 해저전선 부설.
11월 17일 일본 「제2차 한일협약(을사늑약)」을 강제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완전 박탈함.
秋鹿村役場本 「시마네현(島根縣)고시 40호」(回覽用), 橋立戰時日誌, 極秘明治三十七八年海戰史.


1906 (4239, 丙午) 대한제국 광무 10

2월 1일 統監府와 통감 휘하의 理事廳이 업무를 개시, 대한제국은 일본 통감의 지배하에 들어감.
3월 28일(음력 3월 4일) 島根縣 제3부장 神西由太郞과 隱岐島司 東文輔 등이 울도(鬱島)를 방문하여 울도군수 심흥택(鬱島郡守 沈興澤)에게 독도가 일본영토가 되었으므로 시찰차 왔다고 함. 이에 심흥택은 다음 날 강원도 관찰사 서리인 춘천군수 이명래(江原道觀察使署理春川郡守 李明來)에게 “本郡所屬 獨島…”로 시작되는 긴급보고서를 올렸으며, 이명래는 4월 29일 이 내용을 내부와 의정부에 보고함. 이 보고에 대해 내부대신 이지용은 “독도를 일본속지라고 칭하는 것은 전혀 이치가 없는 것이니, 지금 이 보고한 바가 심히 아연할 일”이라 하였고, 의정부 참정대신 박제순(議政府參政大臣 朴齊純)은 “獨島가 일본영토라는 것은 전혀 근거 없는 것이며, 독도의 형편과 일본인의 동향을 다시 조사해 보라”는 지령을 보냄.
9월 24일 울도군(鬱島郡)을 강원도로부터 경상남도로 이속시킴.
各觀察道案 第1冊, 光武 10年 4月 29日條 報告書號外, 指令 第3號, 구한국관보 3570호 부록(광무10년 9월 28일 금요일) 칙령 제4

1910  한국수산지 제1호 제1편에 한국령 표기


1914  경상북도 울도군으로 편제


1915  군제를 폐지하고 제주도와 더불어 도제로 변경, 울릉도군청을 울릉도청으로 군수를 도사로 개편.

1936 (4269, 丙子)

일본 참모본부가 「육지측량부발행지도구역일람도(陸地測量部發行地圖區域一覽圖)」를 작성함. 이 지도는 중일전쟁 직전까지 점령한 지역을 구역별로 나누어 파악한 것으로, 지도에 의하면 독도는 원래 조선의 영토로서 명치집권 후 일본이 강제점령한 지역이 됨. 이 지도는 당시 일본최고의 정확성과 공신력을 가지는 것임.
「陸地測量部發行地圖區域一覽圖」(1936, 陸地測量部 作).

1943 12 / 1 카이로 선언


1945 (4278, )

5월 평화조약문제연구 간사회가 ‘조약체결기본문제’, ‘일본측 준비시책 및 방침’, ‘연합국 조약안 상정 및 이에 대한 대처방침’ 등으로 구성된 보고서를 채택. 독도에 대해서는 ‘한국강점 이전인 1905년에 취득하여 그들의 행정구역에 편입된 영토이므로, 일본이 돌려받을 수 있는 고유영토’라고 규정함.

9월 6일 미국정부는 연합국최고사령부에 속한 미군정의 일본통치정책의 원칙으로 '항복후 미국의 초기 대일본정책'을 발표. 그 훈령의 영토조항 부분은 "일본의 주권은 本州, 北海島, 九州, 四國과 카이로선언 및 미국이 이미 참가하였고, 또 장래에 참가하는 기타 협정에 의해 결정되는 주변의 諸小島(minor outlying island)에 국한된다"고 규정하였다. 이 훈령은 9월 22일 연합국최고사령부에 전달되었다.
9월 27일 미 5함대 사령관의 '각서 제80호'로 일본의 어로제한선을 설정하였는데, 독도는 어로제한선 밖의 한국령에 귀속되어 있음.
10월 13일 연합국최고사령부 공시 제42호로 일본인의 어업구역 한계선을 설정, 이 선은 독도 동쪽 12해리상을 통과.
11월 1일 '일본의 점령 관리를 위한 연합국최고사령부에 대한 항복 후 초기의 기본지령'의 일본영토에 관한 규정이 발표됨. 일본영토를 "4개 본도 및 대마도를 포함한 약 1천개의 더욱 작은 인접 섬들(smaller adjacent islands)로 규정.
12월 19일 맥아더 '연합국의 일본 점령 기본 목적과 연합국에 의한 그 달성의 방법에 관한 맥아더 원수의 관하 부대에 보내는 훈령'을 발함. 여기서 "일본의 주권은 4개 본도와 대마도를 포함한 약 1천개의 인접 작은 섬들에 국한된다"고 규정.


1946 (4279, )

1월 29일 연합국최고사령부는 지령(SCAPIN) 677호 '약간의 주변지역을 정치상 행정상 일본으로부터 분리하는 것에 관한 각서'(연합국최고사령부는 이것을 일본의 정의(the definition of Japan)라고 표현)를 일본정부에 전달, 일본에서 제외시킬 영토를 결정하였는데, 3조 a항에 Utsryo(Ulleung) Island, Liancourt Rocks(Take Island) and Quelpart(Saishu or Cheju Island)라 하여, 독도를 Liancourt Rocks(Take Island)로 표기하고, 울릉도, 제주도와 함께 일본영토에서 분리되는 땅으로 명시하였음. 또한 4조에는 한국(Korea)이 역시 일본으로부터 분리되는 지역으로 명시되어 있다. 한편, 같은 해 발표된 '연합국최고사령부 행정지역 일본과 남한(ADMINISTRATIVE AREAS JAPAN AND SOUTH KOREA)'에서도 부도(付圖)에 위의 3섬은 일본과 구분되어 남한의 영토에 포함되는 땅으로 선을 그어 명확히 표시하였음. SCAPIN 677호는 1952년 연합국최고사령부가 해체될 때 까지 수정 혹은 폐지되지 않았음.

5월 평화조약문제연구 간사회가 ‘조약체결기본문제’, ‘일본측 준비시책 및 방침’, ‘연합국 조약안 상정 및 이에 대한 대처방침’ 등으로 구성된 보고서를 채택. 독도에 대해서는 ‘한국강점 이전인 1905년에 취득하여 그들의 행정구역에 편입된 영토이므로, 일본이 돌려받을 수 있는 고유영토’라고 규정함.

6월 22일 연합국최고사령부가 SCAPIN 1033호 '일본의 어업 및 포경업의 허가구역에 관한 각서'를 통해 일본인의 어업과 포경업 구역을 제한하였는데(맥아더라인), 그 3조 b항에 "일본인 선박과 선원은 북위 37도 15분, 동경 131도 53분에 위치한 리앙쿠르岩의 12마일 이내에 들어오지 못하며, 또한 이 섬에 어떠한 접근도 해서는 안된다"고 하여 독도가 허가구역 밖에 있음을 명시하였음.


1947 (4280, )

미국 3월 20일자로 연합국의 대일본강화조약 초안(제1차 초안)을 작성. 영토조항 1조 "일본의 영토 한정은 제2, 3조에서 한정되는 바와 같이 1894년 1월 1일 현재의 것으로 될 것이다. 이러한 한정은 本州, 九州, 四國, 北海道의 4개 기본 섬과 주변의 모든 작은 섬들을 포함할 것이다. 쿠릴 열도는 제외되지만, 流球열도는 포함된다." 4조 "일본은 이에 韓國과 제주도, 거문도, 울릉도, 독도를 포함한 근해의 모든 작은 섬들에 대한 모든 권리와 권원을 포기한다." 한편, 이 초안에는 연합국의 [구일본영토 처리에 관한 합의서(AGREEMENT RESPECTING THE DISPOSITION OF FORMER JAPANESE TERRITORIES)]가 첨부되어 있음. 이 문서의 제3항 일본이 한국에 반환할 영토에는 한반도 본토와 주변의 모든 섬(all offshore Korean islands)으로 되어 있는데, 여기에 대표적 예로 든 도서로서 제주도, 거문도, 울릉도와 함께 독도를 Liancourt Rocks: Takeshima 로 표기해 넣음으로써, 이 섬이 한국의 영토임을 명확히 하였음. 이 합의서에는 일자가 없으나 대일본강화조약 1947년 1차 초안부터 1949년 5차 초안까지 서류철에 모두 복사되어 철해져 있음.
6월 19일 연합국 극동위원회가 "일본의 주권은 本州, 北海道, 九州, 四國의 諸島와 금후 결정될 수 있는 주위의 諸小島에 한정될 것"이라는 [일본 항복 후 對日基本政策] 을 발표함. 일본은 독도를 반환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기대하에 독도가 일본영토라는 여론을 일으킴.
8월 5일 연합국의 대일본강화조약 초안(2차 초안)이 미국에 의해 작성됨. 내용은 1차 초안과 대동소이 함.
8월 16일-25일 한국산악회 주최로 제1차 학술조사단이 파견되어 약 2주일간 '울릉도 독도 학술조사'를 실시 함.


1948 (4281, )

1월 2일 연합국의 대일본강화조약 미국초안(제3차 초안)이 작성됨. 내용은 1, 2차 초안과 대동소이 함.
6월 8일 미공군기의 폭격연습으로 독도에 출어중이던 한국어민이 30여명의 사상자를 내고, 어선 10척이 침몰되는 사건 발생. 배상액의 규모가 부분적으로 알려졌는데, 울진군 죽변 어업조합의 경우 5백 2십만원의 피해를 입은 어민에게 68만원 정도가 지급된 것이 알려짐.


8 / 15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동시에 경상북도 울릉군 남면도동 1번지로 행정구역이 편입


1949 정부수립 후 경상북도 울릉군으로 환원.


1949 (4282, )

11월 2일 연합국의 대일본강화조약 미국초안(제5차 초안)이 작성됨. 6조에 1-4차 초안의 4조와 같은 내용이 들어있음.
11월 14일 도쿄 멕아더 사령부 정치고문국 고문 시볼드(연합국최고사령부 외교국장)가 5차 초안을 검토하고 맥아더와 상의한 후 워싱턴의 일본문제 담당 버터워스 국무부 차관보에게 독도귀속 수정(남한이 아닌 일본으로)을 電文으로 건의함(“제6조 리앙쿠르岩(다케시마)의 재고를 권고한다. 이들 섬에 대한 일본의 주권은 오래됐으며 정당하다고 생각된다. 안전보장의 고려가 이 섬에 기상 및 레이더 관측소를 상정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11월 19일 도쿄의 시볼드가 미국무장관앞으로 서면 의견서를 발송. 「11월 2일 조약초안에 관한 상세한 코멘트(DETAILED COMMENT ON NOVEMBER 2DRAFTTREATY)」 “한국방면에서 일본이 일찍이 영유하고 있던 도서들의 처분에 관하여 리앙쿠르암(다케시마)이 우리가 제안한 제3조에서 일본에 속하는 것으로 명기될 것을 제안한다. 이 섬에 대한 일본의 영토주장은 오래됐고 정당하다고 생각하며, 또한 그것을 한국 바다의 섬이라고 하는 것은 곤란하다. 또한 미국의 이해와 관계되는 문제로서 안전보장의 고려에서 이 섬에 기상 및 레이더 관측소를 설치하는 것이 고려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12월 12일 미 국무부 정보조사국이 대일강화조약 체결과정에 한국의 참여 여부에 대해 “한국에 대한 협정국적 지위 혹은 자문국적 지위의 공식적 참가를 배제”해야 한다는 의견서를 제출. 이 의견서는 강화조약 준비 관련국과 관련자들이 모두 열람한 것으로 되어 있음.
12월 29일 미국 대일강화조약 6차 초안에서 3조 일본영토 규정조항에 처음으로 독도를 Takeshima(竹島, Liancourt)라는 호칭으로 일본영토에 포함시키고, 일본이 포기하는 한국영토 조항인 6조에서는 제주도, 거문도, 울릉도만 남기고 독도를 제외시킴.

1950 (4283, )

연합국 1949~1950년 「舊日本領土 처리에 관한 合意書」를 작성, 당시 1951년으로 예정되었던 대일본 강화조약을 준비. 제3조 한국에 반환해야 할 영토 “연합국은 한국 본토와 모든 주변의 한국 섬들에 대한 권리와 권원을 대한민국의 주권에 이양할 것에 합의하였다. 그 섬들은 제주도, 거문도, 울릉도, 獨島(Liancourt Rocks, Takeshima)와 모든 다른 섬들을 포함한다.” 부속지도도 작성 첨부.

6월 8일 당시 경상북도지사 曺在千의 참석 하에 독도폭격사건으로 사망한 어민들을 위해서 ‘독도조난어민위령비’를 건립함.
7월 대일강화조약 제6차 미국초안에 대한 주석. “독도(Takeshima)는 한국과 일본의 등거리 중간 지점에 있는데, 명백하게 1905년에 일본이 영토편입을 주장하여 도근현 은기도사의 관리하에 두었다. 또한 독도는 바다사자의 서식지인데, 일본 어부들은 특정 계절에 독도에 이동 거주해 온 것이 장기간이 되었다. 울릉도와 달리 다케시마는 한국 명칭이 없으며, 한국 영토라고 주장된 바도 없다. 독도는 미군점령기에 공군 폭격연습장으로 사용된 바 있으며, 기상 및 레이더 관측소 부지로서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
8월 7일 대일강화조약 제7차 미국초안 작성됨. 일본과 한국의 영토조항을 삭제하고 중국과 소련에 반환되는 섬 이름만 언급하는데 그침.
9월 11일 대일강화조약 제8차 미국초안 작성됨. 영토조항이 더욱 간략하게 되어 제4항에서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인정하고 한국과의 관계는 유엔 총회와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정에 의거한 관계를 갖는다고만 규정. 부수한 각서에도 한국에 대해서는 독립 인정 이외에는 언급하지 않았음.

1951 (4284, )

2월 28일 「대일강화조약 1차 영국초안」 작성됨. 미국측이 7차 미국초안붙터 영토처리를 불분명하게 하자 영국이 독자초안을 작성하기 시작. 영토문제에 대해서는 선을 그어서 일본 근해의 섬들을 일본의 주권하에 포함시키겠다고 하면서 한국방향으로는 울릉도와 제주도를 일본 영토권안에 포함시킴. 이 잘못은 3월 2차 초안에서 바로 수정됨.
3월 23일 「대일강화조약 제9차 미국초안」 작성됨. 일본 영토 조항을 설정하지 않고 제3장의 영토조항 제3항에 일본은 한국에 관한 모든 권리, 권원, 청구권을 포기한다고만 명시하고 구체적인 섬의 명칭들은 언급하지 않음.
3월 「대일강화조약 2차 영국초안」 작성됨. 한국과 관련해서 제1항에서 제주도와 福江島 사이, 한반도와 對馬島 사이, 獨島(Takeshima)와 隱岐島 사이를 연결하는 선을 그음으로써 제주도와 獨島를 한국영토에 포함시키고, 對馬島와 隱岐島를 일본영토에 포함시켜 원래 연합국이 합의했던 대로 복원시킴.
5월 2일 「대일강화조약을 위한 영미토론」. 워싱턴에서 이날 오전 10시 30분에 개최된 제7차 영, 미 양국 실문자 토론회의 자료. 1-6차 토론 내용은 자료가 없어 알 수 없으며, 이 7차 토론회의 내용도 요약기록(summary record)이라 하여 결론만 남겨 놓았으므로 토론과정은 알 수 없음. 이 토론요약에서는 일본이 주권을 포기하는 영토만을 특칭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하면서, 미국 초안 3항에 제주도, 거문도, 울릉도의 3개섬을 끼워 넣자는 의견에 합의했다고 하였음. 일본영토의 규정을 빼므로써 독도의 귀속처가 애매모호하게 됨.
5월 3일 「제1차 영미합동초안」 작성. 영토를 다룬 장의 제2항에서 일본은 한국에 대한 모든 권리, 권원, 청구권을 포기한다고 하고, 괄호 안에 제주도, 거문도, 울릉도를 포함한다는 문구를 넣음.
6월 1일 「영미합동초안(5월 3일자)에 대한 연합국 토론」. 뉴질랜드가 5월 3일자 영미합동초안에 대해서 반대함. 3차 영국초안처럼 1조에 經緯線을 정확히 표시하여 일본영토를 정확히 限定시켜 일본 주변에 있는 어떠한 섬에 대해서도 主權紛爭의 여지를 남기지 않도록 하자고 주장. 이에 대해 미국은 “그렇게 하는 경우 일본에게 울타리를 친 것 같이 보여서 심리적으로 일본에게 불이익을 줄 것 같아 영국초안을 사용하지 않기로 미, 영간에 합의했다. 東京에서 영국초안을 토론할 때 日本人들이 영국초안에 反對했기 때문에 이 안을 폐기했으며, 한국영토에 제주도, 거문도, 울릉도를 포함시키는 미국초안을 가지고 영국측을 설득했다”라고 답함. 이로써 미국이 전후 독도귀속 문제의 처리과정에서 한국과 일본에 각기 다른 즉, 불평등한 입장으로 대처했다는 것이 드러난 것임.
6월 14일 「영미합동改正초안」 작성. 제2장 영토부분에서 제2조 a항에서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인정하고, 제주도, 거문도, 울릉도를 포함한 한국에 대한 모든 권리, 권원, 청구권을 포기한다”는 문장으로 처리하고, 일본의 영토에 대한 설명은 생략하므로써 독도는 한국영토표시에서 누락되었고, 일본영토에도 표시되지 않았다. 일본영토 표시조항 자체가 생략되므로써 추후 영토분쟁의 여지를 남김.
9월 8일 샌프란시스코에서 「대일본강화조약」이 체결됨. 2조 a항에 “일본은 제주도, 거문도, 울릉도를 포함한 조선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한다”고 하므로써 1946년 「SCAPIN 677호」의 "제주도, 거문도, 울릉도, 독도"가 "제주도, 거문도, 울릉도"로 변경되었음.

1951 독도 조난어민 위령비 건립

1952 (4285, )

1월 18일 한국전쟁발발 후 일본어선의 맥아더 라인의 침범이 잦아짐에 따라 한국정부가 「인접해양의 주권에 대한 대통령선언」(국무원 고시 제14호)을 공포 함(일명 평화선, 혹은 李라인). 그 범위는 북위 38도 동경 132도 50분까지로 독도를 기점으로 하는 것임.
1월 28일 일본정부 평화선 선포에 항의함과 동시에 독도에 대한 한국 영유권을 부정하는 외교문서(구술서)를 보내 옴. 이로써 한일간 독도영유권 논쟁이 본격적으로 촉발 됨.
2월 12일 한국정부, 일본정부의 1월 28일자 구술서를 반박하고 독도영유권을 재천명하는 구술서를 일본정부에 보냄.
4월 25일 맥아더 라인 폐기 됨. 일본정부, 한국정부에 2월 12일자 한국정부의 구술서를 반박하는 구술서를 보냄.
4월 28일 샌프란시스코 대일강화조약 발효.

5월 23일 제13회 중의원 외무위원회에서 이시하라 외무정무 차관이 의원 질의에 대해 “이번 일본 주둔군 연습지 설정에서 독도 주변이 연습지로 지정되면 일본의 영토로 확인받기 쉽다는 발상에서 외무성에서 연습지 지정을 오히려 바란다”는 것은 사실이라고 답변함.

7월 26일 미일합동위원회 미일행정협정 2조에 따라 독도 및 주변해역을 주일 미군의 해상훈련구역으로 지정(일본은 외무성 고시 34호로 이를 공시).
9월 15일 미군 독도에 2차 폭격훈련을 감행 함. (사상자는 발생하지 않았음)
11월 10일 한국정부 미대사관에 폭격사건의 재발방지 요구
11월 10일 한국정부 미대사관에 폭격사건의 재발방지를 요구하는 공문을 보냄.
12월 4일 미대사관 한국정부에 독도를 폭격연습지로 사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답장 보냄.


1952 1 / 18 이승만 대통령 '인접해양 주권에 관한 대통령 선언'


1 / 28 일본정부 다께시마 영유권 주장


5 / 28 일본 시마네현 어업시험장 소속 시험선 '시마네마루'호 독도영해 침범


6 / 25 일본 수산시험선(미국기 게양) 1척 독도상륙.


8 / 10 일본인 9명이 독도(동도)에 입도하여 '독도 조난 어민 위령비' 파괴. "도근현 은기촌 죽도"라는 푯말 세움. 건립즉시 제거


1953 (4286, )

3월 19일 미일합동위원회 소위원회가 독도를 미공군의 훈련구역에서 제외시킴.

4월 25일 일본정부, 한국정부에 독도가 일본영토라는 내용의 항의 외교문서를 보내옴.
5월 28일 시마네현 어업시험장의 시험선 시마네호가 독도에 침입.
6월 22일 일본정부, 한국정부에 시마네호가 동년 5월 28일 11시경 해산물 실험조사를 위해 독도부근에 들어가 보았더니 약 30명의 한국인들이 독도와 그 수역에서 해산물를 채취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는데, 이것은 일본영토인 다케시마에 대한 한국인들의 불법침입으로 이에 엄중 항의하며 이를 방지해 달라는 요지의 항의 구술서를 보내옴.
6월 25일 오후 4시 30분 경 미국기를 단 일본 수산시험청 소속 선박이 독도에 침입. 승무원 9명이 독도에 상륙, 머물고 있던 한국인 6명에게 체류이유를 따지고 사진을 찍었으며, 우리 정부가 건립한 표지판의 사진도 찍은 후 오후 7시 경 돌아 감.
6월 26일 한국정부, 일본정부의 6월 22일자 구술서에 대한 반박 구술서를 일본정부에 보냄. 그 내용은 독도가 한국영토의 일부임은 이미 밝힌 바와 같이 의 문의 여지없이 명백하고, 따라서 한국정부는 한국인들이 한국 영해에서 어로작업에 종사하는 것은 매우 합법적이고 적절한 것이라고 평가하며, 일본정부는 한국정부에 항의서를 제출할 입장에 있지 않다는 요지였음.
6월 27일 오전 10시 경 미국기를 단 일본선박이 독도에 침입. 8명의 일본인이 독도에 상륙, 6월 25일 한 행동과 동일한 행동을 하고 오후 3시 경 돌아감.
6월 28일 오전 8시 경 일본 해상보안청 소속 오키호와 구주류호가 독도에 침입. 약 30여 명의 일본 관리들과 경찰관들이 독도에 상륙하여 "島根縣 隱地郡 五箇村 竹島" 라고 쓴 2개의 경계표와 2개의 게시판을 설치함. 게시판의 하나는 "일본 국민 및 상륙을 위해 합법적 절차를 밟은 외국인을 제외하고, 일본정부의 허가를 받지 않는 모든 사람의 출입을 금함"이라는 효지의 글. 일본인 관리들은 6명의 한국 어부들을 권총으로 위협하면서 독도는 일본영토이므로 떠나라고 요구한 후 오전 10시 경 독도를 떠남.
7월 8일 대한민국 국회 일본의 독도침범에 대해 결의문을 채택함. "대한민국의 주권과 해양주권선의 침해를 방지하기 위한 적극적인 조치를 취하여 금후 독도에 대한 한국어민의 出撈를 충분히 보장할 것. 일본관헌이 건립한 표식을 철거할 뿐 아니라 금후 如斯한 不法侵害가 재발되지 않도록 일본정부에 엄중 항의할 것."

7월 13일 일본정부 장문의 구술서 「일본정부의 견해」(일본정부견해 1)를 보내옴. 여기서 독도를 훈련구역에서 제외시킨 것을 가지고 “미일합동위원회의 협의 대상은 일본국내 시설 또는 구역이므로, 독도가 이 위원회에서 다루어지고, 결정이 내려졌다는 것은 독도가 일본국내의 시설 또는 구역에 해당되었다는 것이며, 더욱이 합동위원회가 미군의 연습구역에서 해제시켰다는 것은 곧 일본으로의 반환을 의미하는 것”이라 주장함.


7월 28일 제16회 중의원 수산위원회에서 ‘한국의 다케시마 침략’에 대한 외무성의 대책에 대한 의원 질의에 외무성 시모다 조약국장은 “다케시마는 고래 일본의 영토이며, 더 이상 법률적으로 전혀 의문의 여지가 없으므로, 영토 분쟁 시에는 국제재판소의 절호의 재판제목으로서, 일한간 교섭이 확실치 않을 경우 국제재판 같은 것도 은밀히 고려하고 있다”고 답변함.

7월 10일 경상북도의회는 일본이 6월 25일, 27일, 28일 3번에 걸쳐 미국기를 달고 독도에 침범, 어로작업 중인 한국인을 축출하고, 한국의 영토표식과 위령비를 파괴하고, 그들의 게시판을 설치한데 대해 중앙정부가 강력한 조치를 취할 것을 건의함.
7월12일 일본 관리 30명 독도에 파견.
7월 13일 일본측 구술서. '일본정부견해'를 보내옴.(일본정부견해 1)
8월 4일 한국측 구술서. 일본 관헌의 표식 건립에 항의.
8월 8일 일본측 구술서. 8월 4일자 한국측 구술서 반박.
8월 22일 한국측 구술서. 일본 公船의 한국 영해 침범에 항의.
9월 4일 중의원 외무위원회에서 외무성 시모다 조약국장은 “제3국의 조정을 모색하는 것도 생각할 수 있으며,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 판결을 청하는 방법도 있는데, 우리측 설명으로써 국제법정에서 완전히 이길 자신이 있다”고 발언함.
9월 9일 한국측 구술서. '한국정부견해'를 보냄.(한국정부견해1)
9월 17일 오전 9시 30분경 일본 수산시험청 소속 선박 1척 독도수역 침입, 12시 30분경 어업시험관을 포함한 일본관리들이 독도에 상륙.
9월 26일 한국측 구술서. 일본 公船의 영해침범에 항의.
10월 3일 일본측 구술서. 일본정부견해를 다시 보내올 것을 통보.
10월 15일 한국산악회 회원들이 독도(동도)에 화강암 표석을 세움.

1954 (4287, )

2월 10일 일본정부, '일본정부견해 2'를 수록한 구술서를 보내옴.
2월 26일 일본 자국민에게 독도지역에 대한 인광석(燐鑛石) 채굴권을 허가하고 광구세를 징수하기 시작함.
5월 18일 한국정부, 관리들과 석공을 파견하여 일본관리들이 만든 표지판을 철거하고, 독도 남동쪽 암벽에 '韓國領'과 태극기를 세겨 넣음.
5월 23일 일본정부, 해상보안청 순시선 츠루가호를 독도에 파견, 한국령과 태극기가 새겨져 있음을 확인.
6월 14일 일본, 韓國船 영해침범과 한국정부의 암벽 조각물 및 한국어부들의 어로활동에 대한 항의 구술서 보내옴. 같은 날 한국정부 역시 일본에 日本公船 영해침범과 5월 23일의 일본 순시선 츠루가호의 독도침입, 5월 28일 또 다른 선박 1척의 독도침입 및 승무원의 상륙, 한국측 표지물의 사진촬영 사실에 대해 항의 구술서 보냄.
6월 16일 일본, 순시선 츠루가호를 독도에 파견.
7월 28일 일본, 순시선 나가라호와 쿠주류호를 파견, 한국 어부들의 어로작업과 한축측이 세운 영토표지판 및 태극기를 관찰하고 사진을 찍음.
8월 15일 독도 동도 정상에 무인등대 설치.
8월 23일 일본, 순시선 오키호 독도에 파견. 오키호는 서도 북서쪽 해안에 접근하다가 서도 해안의 독도의용수비대로부터 약 10분간 600발의 경고사격을 받음.
8월 24일 경북도에서 제작한 독도영토표지석 동도에 설치. 같은 날 일본은 순시선 오키호를 파견, 섬 주위를 선회하다가 한국정부가 건립한 등대를 발견하고 철거를 요구해 옴.
8월 26일 일본은 일본순시선 피격에 대한 항의 구술서를 보내옴.
8월 27일 일본, 독도에의 한국기 게양과 등대건립에 대한 항의 구술서를 보내옴.
8월 28일 독도의용수비대 동도 서쪽 몽돌해변에 ‘대한민국 경상북도 울릉군 독도의 표(大韓民國慶尙北道鬱陵郡獨島之標)’라고 쓴 영토표석을 세움.
8월 30일 한국, 일본 공선의 영해침범에 대한 항의 구술서를 일본 정부에 보냄.
9월 1일 한국은 일본측 8월 27일자 구술서에 대한 반박과 함께, 연이은 일본 순시선의 영해 침입에 강경 항의.
9월 15일 3종의 독도 도안 우표 발행함(일본은 이 우표가 첨부된 한국의 우편물을 반송하려 하였으나, 반송이 어렵게 되자 우표에 먹칠을 한 채 배송하였음). 같은 날 한국정부, 일본정부에 등대설치 사실 통고.
9월 24일 일본, 등대설치에 대한 항의 구술서를 보내옴.
9월 25일 일본정부, 등대설치에 대한 항의와 함께, 한국정부에 대해 한일간의 독도문제는 국제법의 기본적 원리 해석을 포함한 영유권 분쟁으로, 분쟁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국제사법재판소에 최종결정을 위임하자고 제의해 옴.
10월 2일 일본 해상보안청 순시선 오키호와 나가라호가 동도 1.5마일내로 접근, 한국 독도의용수비대원 7명이 대포(나무 대포)의 덮개를 벗기고 순시선을 향해 사격태세를 갖추자 철수함.
10월 21일 일본, 독도에 '대포 설치'된 것에 대한 항의 구술서를 보내옴.
10월 28일 한국정부, 일본정부의 '독도문제 국제사법재판소 회부'제의를 거부함. "한국이 독도영유권을 갖고 있음은 논란의 여지도 없는 것. 일본정부는 마치 독도에 대한 영유권을 가진 것처럼 전제하면서, 존재하지도 않는 '독도영토분쟁'을 만들어 비록 일시적일지라도 한국과 대등한 입지에 서려고 하는 것".
11월 19일 일본정부는 독도도안우표가 붙은 한국 우편물을 반송하기로 의결함.
11월 21일 일본, 해상보안청 순시선 오키호와 헤쿠라호를 독도에 파견. 헤쿠라호가 동도로부터 1,500야드 떨어진 해안에 접근하자 한국의 독도의용수비대가 연기신호를 이용, 철수할 것을 명령. 순시선이 이를 무시하고 더욱 접근하므로 의용수비대 오전 6시 58분부터 7시 사이 5발의 포탄으로 경고사격 함.
11월 29일 일본, 한국정부에 독도우표발행에 대해 '독도를 한국영토로 세계에 알리려는 선전활동' 이라고 항의해 옴.
11월 30일 일본정부, 일본 순시선 피격에 대해 항의해 옴.
12월 13일 한국정부, 독도의 무장과 우표발행의 합법성을 천명. "독도는 한국영토의 일부, 독도를 그린 우표의 발행은 대한민국정부의 통치권내의 일이므로 일본정부는 이에 항의할 위치에 있지 않다"
12월 30일 한국정부, 일본정부에 일본어선의 영해침범을 항의하는 구술서를 보냄.

1955 (4288, )

7월 8일 한국정부, 독도에 新燈臺 건립.
8월 8일 한국정부, 일본정부에 신등대 설치를 통보.
8월 16일 일본정부, 한국의 등대, 창고 설치에 항의해 옴.
8월 24일 일본정부, 한국의 등대설치통고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구술서를 보내옴.
8월 31일 한국정부, 일본정부에 등대 설치 등에 대한 합법성을 재천명하는 구술서를 보냄.


1956 (4289, )

9월 20일. 일본정부, '한국정부견해(2)'를 반박하는 구술서를 보내옴. 또한 25일 독도가 일본영토임을 주장하는 장문의 구술서 '일본정부견해(3)'을 보내 옴.

9월 25일 독도가 일본영토임을 주장하는 장문의 구술서 「일본정부 견해 3」이 옴.
12월 독도경비임무가 독도의용수비대에서 울릉경찰서로 완전 이관됨.

1957 (4290, )

4월 19일 일본정부, 순시선 츠가루호를 독도에 파견, 독도의 시설물들을 관찰.
5월 8일 일본정부, 독도에 한국官民의 상주, 등대의 상존에 항의하는 구술서를 보내 옴.
6월 4일 한국정부, 일본의 구술서를 반박하고 츠가루호의 독도수역 침범에 강력히 항의하는 구술서를 일본정부에 보냄.
8월 11일 일본정부, 순시선을 파견. 독도를 관측함.
10월 6일 일본정부, 다시 한국관민의 상주와 등대의 상존에 항의하는 구술서를 보내 옴.
10월 20일 일본정부, 순시선을 파견. 독도를 관측.
12월 25일 일본정부, 또다시 한국官民의 상주와 등대 상존에 항의하는 구술서를 보내 옴.

1958 (4291, )

1월 7일 일본정부, 독도의 한국官民상주와 등대 상존에 대한 항의구술서 보내옴.
5월 7일 일본 순시선을 파견, 독도를 관찰.
9월 10일 일본 순시선을 파견, 독도를 관찰.
10월 6일 일본정부, 독도의 한국官民상주와 등대 상존에 항의하는 구술서를 보내옴.

1959 (4292, )

1월 7일 '한국정부견해(3)'을 일본정부에 보냄.
9월 15일 일본 순시선 헤쿠라호 독도 해역 침범.
9월 18일 일본순시선 영해침범에 대한 항의 구술서를 일본정부에 보냄.
9월 23일 일본정부, 한국정부의 9월 18일자 구술서를 반박. "다케시마(竹島-독도)는 일본영토이므로 한국정부는 항의할 위치에 있지 않다"
12월 8일 일본 해상보안청, 순시선을 독도에 파견.
12월 13일 한국정부, 일본순시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