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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op] '스티븐슨'를 사살한 장인환씨 미국에서 귀국 / <동아일보> 1927년 4월 23일자
 admin  2013.07.14, 조회 :8795 

앨범 표지
기울어지는 나라의 장래를 염려하는 뜨거운 생각을 품고 지금부터 23년전에 창해만리 태평양을 건너가서 19년 전에 '샌프란시스코' 부두에서 그 당시 한국정부 재정부 고문이면서 미국대통령 '루스벨트'씨에게 양해를 구하러 간다던 'Durham White Stevens'을 권총으로 사살하고 미국관헌에 붙잡혀 10여년 동안을 감옥생활을 하여 역사의 중요 페지를 차지하는 장인환(張仁煥, 51)씨는 지난 3월 19일에 미국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하여 23년만에 한많은 고국의 땅을 밟으며 20일 오전 다섯시 사십분 평양역 도착 열차로 그리운 고향에 귀환하여 방금 그 삼촌되는 선교리 140번지 장명진(張明鎭)시 집에 여장을 풀었는데 천하의 큰 뜻을 품고 인생 일세의 반생을 혹은 피보다 뜨거운 눈물을 음침한 철창 속에서 하염없이 부리며 부질없는 인생의 깊은 한을 느끼던 씨는 변천많은 고국의 설움을 다시금 느끼게 되었더라.


독립운동가 평양 대동면에서 출생했다. 어릴 때 부모를 여의고 학업을 포기하는 등 어렵게 생활하다가 일찍이 미감리회 초기 신자로 입교하여 세례를 받았으며, 학자의 풍채를 가졌으나 한편 무사의 기개도 가진 인물이었다. 1905년 2월 하와이 이민단에 속하여 하와이 마유 섬에서 노동하다가, 이듬해 8월 미국 본토로 들어가 철도 노무자, 알래스카 어장 노무자 등으로 종사하는 한편 대동보국회(大同保國會)에 가입하여 민족운동에 참여하고 있었다.


한편 1908년 3월, 당시 한국 정부의 외부(外部) 고문으로 있으면서 일본의 한국 강점을 적극적으로 지지ㆍ조력하던 친일 미국인 스티븐스(D.W. Stevens)가 휴가차 샌프란시스코에 왔다. 스티븐스는 1904년 체결된 한일협약에 따라 일본 정부가 추천한 고문관 고용규칙에 의해 임용된 인물로서, 한국에 오기 전부터 주미 일본 공사관 고문ㆍ일본 외무성 관리로 일본 정부의 충실한 종으로 일하고 있었으며, 재정고문 메가다와 함께 일본 정부 추천을 받아 한국 정부에 고용되었다.


따라서 그의 표면적 상관은 한국 정부의 외부였으나 실질적 상관은 이토 히로부미였다.


그는 한국 정부의 모든 외교문서를 검열"감독하면서 일본에게 유리한 외교정책을 펴나갔고, 을사보호조약(1905) 체결에 이어 정미7조약(1907) 체결까지 이루어냈으며, 정미7조약 체결 후 특별 휴가를 얻어 미국 내 반일 분위기를 무마시키기 위해 본국에 돌아갔던 것이다.


그는 1908년 3월 21일,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일본의 한국 침략을 정당화하고 지지하는 기자회견을 자청하였으며, 그 요령은 다음과 같다. 1. 한국이 일본의 보호를 받은 후에 발전이 계속되며 인민이 일본의 보호 정책을 좋아하여서 한일 양국 백성의 교의는 매우 친선하게 되어 있다.



2. 일본의 한국 정책은 미국이 필리핀을 다스리는 것보다 나은 대우를 하고 있다. 3. 일본 보호 아래에 한국 정부를 새로 조직한 후에 정부 요직을 얻지 못한 소수 사람들이 불평을 가지고 일본을 반대하는 것이고, 백성 전체는 농촌의 농민까지도 일본의 보호 정치를 좋아하는데 지금 정부는 전과 같이 백성을 학대하지 않는 까닭에 환영을 받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언동은 재미 동포들을 격분하게 하였다. 다음날 저녁 8시 공립협회를 비롯한 각 단체는 공동회의를 열고 대표 4인(최정익ㆍ문양목ㆍ정재관ㆍ이학현)을 선출하였고, 이들은 스티븐스가 머물고 있던 페어몬드호텔로 찾아가 면담하고 기자회견 내용을 정정하라고 요구하였다. 그러나 스티븐스는 이를 거절하였다. 이에 분함을 참지 못한 정재관이 스티븐스를 쳐서 거꾸러뜨리고 다른 대표는 의자를 들어서 치니 스티븐스의 면부가 상하여 유혈이 낭자하므로 호텔에 있던 사람들이 달려들어서 싸움을 말렸다.

이후 대표들이 돌아와서 경과를 보고하니 회중들은 더욱 분개하였고 마침내 공립협회 회원 전명운이 스티븐스를 암살하겠다고 자원하였다. 이때 장인환은 아무 말 없이 있었으나, 혹 실수가 있을까 염려하여 홀로 제2차 거사계획을 결심하였다.

한편 구타를 당한 후에 겁이 나서 속히 워싱턴으로 갈 것을 생각한 스티븐스는 이튿날인 3월 23일 아침 9시 30분, 샌프란시스코 주재 일본 영사 소지(고이께)와 함께 샌프란시스코 역에 당도하였다. 이에 계획대로 전명운이 권총을 쏘았으나 그만 불발되었고 이에 스티븐스에게 달려들어 격투를 벌였다. 이때 역시 그곳에 사전 약속 없이 잠입해 있던 장인환이 권총을 뽑아 스티븐스를 저격하였다. 이에 스티븐스는 치명상을 입어 이틀 후 절명하였고, 일본 영사는 도망갔으며 함께 격투를 벌이던 전명운도 한 발의 총탄을 맞아 부상당했다.

쓰러진 스티븐스 앞에서 두 사람은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고, 달려온 경찰에 의해 스티븐스와 전명운은 병원으로, 장인환은 체포당했다. 장인환은 몰려든 기자에게 거사 이유를 떳떳이 밝혔다.

"여러 말 할 것 없이 일본인이 한국에 대하여 불의 행동하는 것은 세상이 아는 바이오, 스테분이는 한국 고문관으로 한국 월은(月銀)을 먹으면서 도리어 일본을 도와주고 한국 이천만 동포를 은근히 독살하는지라. 내 나라를 망하게 하는 도적을 없애지 아니하면 우리는 일본인의 손에 멸망을 당하는 것이니 나의 마음의 탱중한 분기를 이기지 못하여 국적(國敵)을 없이하고 내 몸을 살신성인하여 나와 같은 의사들이 연속하여 내 뒤를 따라 오기를 원하는 바이오. 만일 내 생명을 돌아보고 목숨을 도모코저 하더라도 나의 부모처자 형제자매가 매일 일본인에게 학살을 당하는 터인즉 살아도 산 것이 아니라."

1908년 3월 27일, 장인환에 대한 재판이 시작되어 1909년 1월 2일, 2급 살인죄로 25년 금고형을 선고받았다.

본래 일본과 스티븐스의 유족은 사형을 받게 하려 했으나, 당시 유명한 변호사 카클린ㆍ파웰ㆍ배렛 3명이 장인환의 애국 정신에 감명받고 열심히 노력한 결과였다.

한편 공립협회와 대동보국회는 연합하여 두 사람의 후원회를 조직하고 재판 경비 조달ㆍ변호사 교섭ㆍ통역 선택 등을 담당하였다.

이때 처음에는 통역으로 이승만을 청하였으나 형편을 살펴본 그가 "시간이 부족하고 예수교인의 신분으로 살인재판 통역을 원하지 않는다" 하여 거절하자 다시 신흥우를 청하여 통역하였다.

이 외에도 국내, 미주, 하와이, 멕시코, 중령, 일본 등 각지의 동포들이 의연금을 모으니 무려 7천 3백 50달러에 달하였다. 이후 애국심과 예의바른 품행 등으로 점차 형이 감량되어 10년 만인 1919년 1월 17일 가출옥하였고 1924년 4월 10일 형이 면제되었다. 1927년 조만식 등의 환영을 받으며 귀국하여 51세의 나이로 윤치복(尹致福)과 결혼한 뒤 선천에 고아원을 설립하였으며 그곳에서 여생을 보내려 했으나 일제의 학정 밑에서 살 수 없어 가족과 작별하고 다시 미국에 건너가 세탁업을 시작했다. 이후 상심과 번민이 심하여 병고에 시달리다가 1930년 5월 22일 투신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수여되었다.

[출처] '스티븐슨'(스티븐스)를 사살한 장인환씨 미국에서 귀국 / <동아일보> 1927년 4월 23일자 |작성자 pane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