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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해동제국기
권혁선  (2017년 10월 20일 05시17분01초)  


정의

1471년(성종 2) 신숙주가 일본의 지세와 국정, 교빙내왕의 연혁, 사신관대예접의 절목을 기록한 책.

내용

1책. 석인본. 1443년(세종 25) 서장관으로서 일본에 다녀온 신숙주가 왕명에 따라 찬진한 것이다.

‘해동제국’이란 곧 일본의 본국·구주 및 대마도·이키도와 유구국를 총칭하는 말이다. 찬술 당시의 내용은 해동제국총도·일본의 본국도·서해도구주도·이키도도·대마도도·류큐국도 등 6매의 지도와 일본국기·유구국기·조빙응접기 등이었다.

그 뒤 2, 3편의 추록(追錄)이 첨가되어 1473년 전산전 부관인 양심조 궤향일 정서계(畠山殿副官人良心曹饋餉日呈書契)가 권말에 부록(附錄)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3월 예조좌랑 남제(南悌)가 삼포왜호(三浦倭戶)의 실화(失火)를 진휼(賑恤)할 때 왕명을 받들어 삼포의 지도를 모사하고, 또 항거왜인(恒居倭人)의 호구(戶口)를 조사한 결과로 만들어진 웅천제포도(熊川薺浦圖)·동래부산포도(東萊釜山浦圖)·울산염포도(蔚山鹽浦圖) 3매가 권두의 지도에 첨가, 삽입되었다.

또한, 1501년(연산군 7) 류큐국의 사자(使者)가 우리 나라에 내빙할 때 병조판서 이계동(李季仝)의 건의로 선위사(宣慰使) 성희안(成希顔)이 국정을 상문열기(詳問列記)한 것이 이 책 끝에 부록되었다. 이와 같이, 수차의 추록이 있었으나 원내용에 대해 보수(補修)한 흔적은 없다.

이 책의 찬자인 신숙주는 세조 때의 중신(重臣)으로서 일찍부터 국가의 추기(樞機)에 참여한 인물이었다. 특히 그는 세조의 명령에 따라 영의정으로서 예조의 사무를 겸장, 사대교린(事大交隣)의 외교 정책을 전담하였다.

그리고 성종 즉위 이후 구규(舊規)를 정비하고 신제(新制)를 입안(立案), 해동제국 사인응접(使人應接)의 사례를 개정해 외교상의 면목을 일신하게 하였다.

이와 같이, ≪해동제국기≫는 그의 견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그 당시 일본에서 전래된 문헌과 왕년(往年)의 견문, 예조에서 관장한 기록 등을 참작해 교린 관계에 대한 후세의 궤범(軌範)을 만들기 위해 찬술한 것이다. 따라서 추록된 부분도 연산군대의 것을 제외하고는 그가 직접 첨가한 것으로 추측된다.

이 책은 한일 관계의 역사적 변천과 조빙응접(朝聘應接) 규정의 연혁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이 상당히 정비되어 있어 교린 관계의 선규(先規)로서 오랫동안 참고되어왔다.

그러나 고간본(古刊本) 또는 고사본(古寫本)이 아직 국내에서는 발견되지 못했고, 일찍이 인조 때 중간된 것이 예조 소속의 나이 많은 관리 집에서 겨우 1본(本)만이 보장(保藏)되었을 뿐이었다.

중간된 뒤에도 1782년(정조 6) 4월의 외규장각형지안(外奎章閣形止案)과 같은 장서목록(藏書目錄)에서나, 또는 김경문(金慶門)의 ≪통문관지 通文館志≫와 안정복(安鼎福)의 ≪열조통기 列朝通紀≫와 같은 인용 서목에 책명만 보일 정도이다. 더욱이 그 내용도 지도를 제외한 전문(全文)이 ≪해행총재 海行摠載≫에 수록되어 있을 뿐이다.

이에 비해 일본에서는 고사본 2, 3본이 알려져 있다. 즉, 고간본도 동경(東京)의 나이가쿠문고(內閣文庫) 소장의 구사에키모리씨고조쿠재장본(舊佐伯毛利氏江粟齋藏本), 동경대학 사료편찬소(史料編纂所) 소장의 구요안원장서본(舊養安院藏書本) 등 몇 종류가 있다.

이 책은 조선 초기와 일본 무로마치막부시대(室町幕府時代)의 한일외교 관계에 있어서 가장 정확하고도 근본적인 사료이다. 때문에, 우리 나라에서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도 에도시대(江戶時代) 한일관계 연구의 유일한 사료로 폭넓게 이용되어왔다.

우리 나라에서는 1933년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에서 ≪조선사료총간 朝鮮史料叢刊≫ 제2집으로 영인, 간행하였다. 그리고 1974년민족문화추진회(民族文化推進會)에서 ≪해행총재≫를 간행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해동제국기 [海東諸國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