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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태동기] 

정보와 박지원
권혁선  (2014년 09월 26일 18시49분38초)  


정조는 출사(出仕)하여 관료로서 정치에 입문하지 못했던 연암 박지원과는 직접적이고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비중이 컸던 노론성향의 박지원 가문, 그와 학문적 성향이 같았던 연암학파들, 그가 지은 열하일기의 사회적 영향 등으로 정조는 연암 박지원의 존재를 관심있게 주시하였다고 본다.

영정조시대 박지원의 가문은 그 정치적 역할이 컸다. 박지원에게 청 고종의 70세 진하사절의 수행원으로 청나라의 여행 기회를 마련해 준 삼종형(三從兄)인 박명원(朴明源)은 영조대 사도세자의 깊은 신임을 받았고, 정조 즉위 후 사도세자의 능을 수원으로 옮길 것을 건의하여 실현시켰다. 그리고 박지원의 숙부인 박사근(朴師近)은 영조의 깊은 신임을 받은 여호 박필주(黎湖 朴弼周)의 양자였다. 박필주는 삼연(三淵) 김창흡의 문인으로 그의 재종조인 박세채의 학문과 정치적 입지까지 이어받아 큰 영향력을 행사한 산림학자다. 박지원은 박세채와 박필주를 집안의 큰 학자로 추앙했다. 즉 " 같다면 벌써 참이 아니다 ."라고 함으로써 현실을 어떤 틀에 맞추는 형식주의와 무사상성을 거부한 박지원의 독창성과 자유분방함은 이러한 가문의 분위기에서 영향을 받았다.

이렇게 정치적으로 대단히 비중있는 가문에서 성장한 박지원은 그가 속한 노론 청명당과 가까운 친구들 그리고 연암학파라고 불리는 친우와 제자들이 핵심적으로 활동한 규장각 각신, 초계문신, 검서관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함으로써 그의 경륜을 현실정치에 적용하였다. 박지원은 정조 즉위 후 한때 홍국영의 정치적 공세를 받아 황해도 금천 연암골로 은거할 때 당시 집권주류의 하나인 청명당의 핵심인물이었던 유언호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하였다. 그리고 정조의 학문정치를 구현하고 신분에 구애없이 인재를 등용을 했던 규장각의 각신, 초계문신, 검서관들에는 사실상 박지원을 학문적 지도자로 받드는 연암학파들이 대거 포진하고 있었다. 정조는 이들과 함께 명말 청초 이래의 경세학, 기술학, 서양학, 고증학을 위시한 중국문화를 토론하고 그 과정에서 박지원의 열하일기도 함께 비교하면서 읽어보았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조대 전개된 문체반정운동(文體反正運動)은 정조가 일개 재야의 학자로서 지방의 일개 관료에 지나지 않았던 박지원을 예의 주시하고 그의 정치적 사회적 영향력을 크게 평가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문체반정으로 알려진 정조시대의 문체사건이란 당시 유행하던 패관소품체(稗官小品體)를 과거시험지나 상소문 등에 사용한 신하들을 처벌하거나 파직한 사건을 가리킨다. 1787년과 1792년 두차례에 걸쳐 발생한 이 문체사건은 초계문신제와 같은 제도적 차원의 교화방침이 노론 벽파 신하들의 반발에 부딪히고 서학문제 등으로 애초의 구상에 차질이 빚어짐에 따라 정조가 취한 임시방편적 조처였다. 그런데 이 사건은 징계를 당한 노론 신하들의 입장에서 볼 때 일종의 필화사건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국왕의 과도한 권력남용으로 이해될 수 있었다.

첫 번째 문체사건은 정조11년(1787) 노론의 김조순과 이상황이 예문관에서 숙직하면서 당송시대의 소설과 평산냉연(平山冷燕)이란 책을 읽다가 왕에게 발각돼 파직되고 책이 불태워진 사건을 지칭한다. 그런데 이 시기는 국왕의 교화정책에 대한 노론의 공격이 본격화되고 있던 터라 정조는 사학(邪學)문제와 관련하여 또 다시 당쟁이 재연될 기미가 보이자 이열치열방식으로 대응하였다. 즉 천주교 문제에 남인들이 많이 관련된 것을 파악한 정조는 남인의 단점을 청의 고증학과 패관소품체에 심취해 있는 노론의 문제점과 대비시켰다. 말하자면 남인학풍의 좋은 점인 육경고문을 취하여 노론의 공격으로부터 남인을 막아내는 한편 주희의 문장론을 높이 평가하여 노론을 회유하고 소론이나 남인으로부터 공격을 차단하려 한 것이다.

두 번째 문체반정은 정조16년(1792) 정조는 동지정사로 중국에 가는 박종악과 대사성 김방행을 접견한 자리에서 패관문체의 심각성을 지적하고 초계문신 남공철의 대책(對策)에 패관문자가 인용되었음을 지적하여 그를 파직시키는 한편 규장각 출신 중에서 남공철, 심상규, 김조순, 이상황을 열하일기같이 속된 학문을 좋아하는 박지원의 당여라고 지목하고 바른 학문에 입각한 반성문을 제출할 것을 명령한 데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정미년에 파직된 이상황, 김조순, 심상규 역시 다시 거론되어 육경고문체의 진술서를 작성하여 올린 후에야 다시 이전의 직책을 부여하였다. 그러나 당시 정조의 총애를 받고 있는 채제공, 이가환의 문체가 문제시 되었을 때, 정조는 성왕의 정치를 구현하려는 탕평책의 일환으로 이가환을 오히려 옹호하였다. 이러한 점으로 보아 정조의 고도의 정치술의 하나였던 문체반정은 정치색을 표백시켜 사실상 가장 중요한 정치적 난제인 사색의 문제를 효과적으로 해결하려는 시도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정조가 박지원을 사실상 막후실력자로 지목한 것으로 뒤집어 생각하면 박지원을 정부의 학문정책을 비판할 수 있는 준론의 지도자로 인정하고 있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