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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세] 

직전법
admin  (2011년 03월 07일 19시56분43초)  


과전(科田)은 경기도 내의 토지에 한하여 지급하였기 때문에 관리 수의 증가와 과전의 세습, 토지의 한정 등으로 인하여 양반관료층 내부에서
점차 대립이 격화되고 있었다. 또한 토지 소유권자인 전객(佃客)의 수조권자인 전주(田主)에 대한 항쟁이 지속적으로 일어났다. 이에
1466년(세조 12) 현직 ·전직 관료를 막론하고 지급하던 사전(私田)을 폐지하고 직전(職田)이라는 명목으로 현직에 있는 관리에게만 수조지를
분급하였다. 이때 전직관료만 토지지급 대상에서 제외된 것이 아니라, 관료의 미망인이나 자녀 등 유가족에게 지급하던 수신전(守信田)
·휼양전(恤養田)의 명목도 폐지하였다. 그 지급액도 과전에 비하여 크게 줄어들었다.



이것은 관리들의 경제력을 약화시키고 국가재정을 강화하려는 목적에서 실시된 것일 뿐만 아니라, 세조의 집권을 시인하고 그 아래에서 관리로서 봉사하는 사람에게만 생활의 기반을 보장해주는 정치적인 의미도 가진 것이었다. 또한 농업기술의 발전으로 인한 농업생산력의 성장, 농민경제의 발달에 따라 토지의 소유자인 전객의 권리와 사적 소유권이 안정되어 가는 추세를 반영하여, 전주의 직접적인 전객 지배를 차단하고 국가가 농민을 직접 지배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추진해 간 것이었다.이는 곧 통일신라시대 이래 지속된 봉건적 경제제도였던 수조권에 기초한 토지 점유관계가 폐기되고 토지 소유권에 기초한 농업생산관계가 점차 부상하는 새로운 발전방향을 보여주는 것이다.



한편, 이 제도의 실시로 퇴직 혹은 사망한 뒤의 경제적 보장이 없어진 관료들이 재직 중에 전객에게서 전조(田租) 및 볏짚을 규정 이상으로
징수하는 등 가혹한 수탈을 자행하였다. 국가에서는 수조율과 볏짚의 징수량을 규정하고, 전주인 관리들의 직접적인 답험손실(踏驗損實)을 금지하였다. 그러나 관리들의 수탈은 계속되어 전객농민의 항거도 그만큼 심각해져, 1470년(성종 1) 직전세(職田稅)로 전환하고, 국가가 경작자에게서 직접 수조하여 관료나 공신에게 해당액을 지급하는 관수관급제(官收官給制)를 실시하였다. 이로써 관료의 직접적인 수조권한이 폐지되어 국가에서 토지 및 농민을 직접 지배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한편 15세기 말 이후 직전의 부족과 재정의 고갈이 만성화되면서 직전세의 일부 혹은 전부를 국가재정으로 전용하는 정책이 자주 실시되었다. 16세기에 이르러 직전세의 지급이 일시적으로 중단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분급액도 줄어들고 연분(年分)도 거의 하하년(下下年)으로 고정되어 직전의 경제적 의미는 미미해졌다. 반면에 사적 토지 소유권은 더욱 성장하여 관리들은 많은 토지를 소유하여 점차 그들의 주된 경제기반으로 삼았다.
16세기 중엽 거듭되는 흉년과 전란으로 재정이 더욱 악화된 것을 계기로 1556년(명종 11)에 직전 분급의 중단을 공포한 후 이것이 장기간
계속됨으로써 직전은 유명무실해져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완전히 폐지되었다. 직전의 소멸은 수조권에 입각한 토지지배 관계의 해체와 동시에 사적 소유권에 바탕을 둔 토지지배 관계, 지주전호제의 본격적인 전개를 의미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