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동기 시대 집터

( admin   2011년 03월 04일   )

농경을 기반으로 본격적인 생산 경제 단계로 발전한 청동기 시대는 사냥이나 물고기잡이 등에 의존한 채집 경제 단계의 신석기시대와는 달리 생활에 큰 변화를 가져오게 되어 독립된 하나의 마을에서 공동체 생활을 하게 된다. 이 때의 마을은 대게 강가나 하천 주변의 농경지나 평탄하고 나즈막한 구릉에 주로 있으며, 주변이 잘 바라다보이는 산꼭대기에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마을 안의 살림터 지역에서는 각 단위별로 토기 석기 청동기 등 생활에 필요한 각종 도구를 만들게 되고, 나무 울타리와 방어용 도랑을 파는 일 등 마을 공동체 구성원 모두에 의하여 이루어지기도 한다. 또한, 마을 안의 집과 멀지 않은 곳에 무덤을 쓰기도 하며, 마을 주변 경사면 아래의 평지에는 벼농사에 필요한 논을 만들기도 하였다.


부여 송국리 울주 검단리 유적과 같이 낮은 구릉상에 형성된 마을은 매우 넓은 면적에 수십 채에서 수백 채에 이르는 집터들이 밀집되어 있었다. 이러한 곳에 커다란 마을이 만들어지는 것은 벼농사에 필요한 농경지를 확보하고, 외적으로부터 마을 공동체를 효율적으로
방어하기에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송국리유적 검단리유적 의창 덕천리유적에서는 마을둘레에 나무 울타리[木柵]나 도랑[環濠]을 돌려 마을의 방어 기능을 더욱 강화시켰음이 확인된 바 있다.
 
청동기시대 집터의 평면은 대부분 긴 네모꼴이고 20∼60cm의 얕은 움을 파서 만들었으며, 벽가와 움 내부에 기둥을 배치하여 지붕 서까래가 땅에서 떨어지고 벽체가 세워지는 반움집도 이 시기부터 나타났다. 화덕은 신석기시대와는 달리 한쪽으로 치우쳐 만들었으며, 대부분움 바닥을 얕게 판 것을 그대로 이용한 것이 많았다. 금강유역의 청동기시대 집터는 평면이 긴 네모꼴인 집터와 함께 평면이 둥글고 움 가운데에 타원형의 작업 구덩이가 있는 집이 많이 만들어졌는데, 화덕 자리는 없는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송국리형주거'는 지금으로부터 약 2,400년 전 무렵부터 우리 나라의 남부 지방으로 퍼져 나갔으며, 일본 야요이문화형성기에는 북구주(北九州)지역까지 파급되는 등 청동기 문화에 끼친 영향은 대단하였다. 한편, 보령 교성리집터는 산꼭대기에 있어 그 위치가 특이하며, 암반을 'ㄴ'자 모양으로 파내어 앞벽이 없다는 점과 화덕자리[爐址]가 집터의 뒷벽 가까이에 있는 점 등이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