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장

( admin   2011년 03월 03일   )



순사(殉死)라고도 한다. 통치자 등 신분이 높은 사람이나, 남편이 죽었을 때 신하나 아내가 뒤를 따르는 습속은 세계적으로 분포하는데,
중심을 이룬 것은 신분 계층이 있는 사회, 뚜렷하게 가부장제적(家父長制的)인 사회, 특히 초기 고대문명과 그 영향권에 있는 사회에서 성행하였다.



중국에서는 은(殷)나라 때 많은 청동기 등의 껴묻거리[副葬品]와
함께 많은 사람을 죽여 순장하는 묘제(墓制)가 있었다. 그 예로서 허난성[河南省] 안양[安陽] 부근의 무관촌(武官村) 북쪽에 있는 큰 묘에서
79구, 허우강[後崗]의 순장갱(殉葬坑)에서 54구의 유체가 발견되었다. 이들 왕후 묘에 순장된 사람들은 왕을 시중들거나, 호위하는 뜻으로
말·개·수레·무기·장신구·청동기·도자기 등과 함께 매장되었다. 또한 은나라에서는 사자(死者)의 부활관념과 관련하여 어린 아이들을 순장하기도
하였는데, 이것은 사자의 영혼에 성장력이 강한 아이들의 영혼을 합일시켜 다시 재생시킨다는 신앙이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중국의 순장
습속은 서주(西周)시대까지 성행하였으나 그 이후에는 급격히 줄었다.


한국에서는 고대국가에서 순장의 습속이 있었다. 중국의 《삼국지》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 부여조(夫餘條)에 보면 부여에서는 귀인(貴人)이 죽으면 ‘사람을 죽여서 순장을 하니, 그 수가 많을
때는 100명에 이르렀다(殺人殉葬 多至百數)’라 하여 순장의 풍속을 전한다. 또한 《삼국사기》
신라본기(新羅本紀) 지증왕조(智證王條)에는 ‘502년(지증왕 3) 봄 3월에 명령을 내려 순장을 금하였다. 그 전에는 국왕이 죽으면 남녀 각
5명씩을 죽여서 순장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이를 금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로 보아 신라의 순장 습속은 국초에서부터 전해져 왔음을 알 수
있고, 기록에는 나타나지 않으나, 부여와 같은 문화권에 있는 고구려, 백제에서도 순장의 풍속은 있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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