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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평관


(  admin   2011년 02월 14일   )

조선시대 때 여진(女眞)의 사신을 접대한 곳. 태종 때 설치된 것으로 보이며, 세종 20년(1438)에 북평관으로 고쳤고, 지금의 동대문·이화여대 부속병원 일대에 있었다.



여기에는 영접도감(迎接都監)의 예에 따라 관원을 두고 관인(官印)을 항시 비치하였으며, 3품 이하 6품관 이상으로 감호관(監護官) 3인, 녹사(錄事) 2인을 두었는데, 감호관 3인 가운데 1인은 의금부(義禁府) 관원으로 겸임 발령하였다.



의금부의 관원에게 겸직하게 한 것은 그만큼 위반사항이 없도록 하기 위한 예방조치인 것으로 보인다. 서울에 들어오는 야인(野人:女眞人)의 수는 풍년과 흉년으로 나누어 각 120명, 90명 등으로 제한하였다. 이와 같은 제한규정은 건국 후 모든 제도가 정비되고, 국고(國庫)가 한정된 데다가 또한 남북으로 큰 변환(邊患)이 없어짐에 따라 취한 조치였다.



더욱이 외교사절이 조선에 도착하면 모든 비용을 우리가 부담하므로, 야인의 상경 왕복로인 함경도와 강원도가 흉년인 때에는 더욱 제한하였다.



여진인이 국경에 설치된 도박처(到泊處)에 도착하면 향통사(鄕通事)가 서울로 인솔하여 왔는데, 이들은 왜인(倭人)과 같은 대우를 받았으나 중국인(明人)과는 차별을 받아, 명의 사신이 오게 되면 이들을 입경시키지 말도록 제약하였다.



서울에 도착하면 여진인이 가진 병기(兵器)를 모두 거두었다가, 돌아갈 때 내주었다. 이들이 관사인 북평관(北平館)에 들면, 금침(衾枕)과 의관(衣冠) 등을 주고 사급물(賜給物)로 쌀·콩·술·고기 등을 주어 대접하였는데, 후대(厚待)하는 뜻에서 5일에 한 번씩 쌀·콩 등을 주도록 조치하였다.



이들은 입경하는 도중에도 노연(路宴)을 받으며, 관사에 들어오면 도착한 날에 예빈시(禮賓寺)에서 영위연(迎慰宴)을 베풀었다. 체류하는 동안에도 최소한 5∼15회 정도의 각종 연회를 사절(使節)의 계급에 따라 베풀었으니 그에 따르는 비용은 물론, 절차도 번잡하였다.



또, 이들이 떠날 때에는 후한 전연(餞宴)을 받고 떠났다. 또 조공과 귀화를 장려하여 여진 추장들에게 지중추원사 이하 호군(護軍)·사직(司直)·만호(萬戶)·천호(千戶) 등의 명예군직을 주기도 하고, 이들이 토산물을 진상(進上)하면 그에 대한 회사물(回賜物)을 주어 보냈다.



명(明)나라가 조선의 이러한 정책을 반대하자, 조선은 건주위(建州衛)와의 정식 교통을 끓고 때때로 만포진에서 여진인의 요구에 따라 약간의 식료품만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