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G-LOGO

북인


(  admin   2011년 02월 14일   )

1. 정의



조선시대 동인(東人)으로부터 남인(南人)과 함께 분당된 정파.



2. 성립과정



북인·남인은 1589년(선조 22) 정여립(鄭汝立)의 역모사건으로 서인에게 정권을 내주었던 동인이 2년 후 재집권하면서 서인에 대한 처벌을 둘러싸고 분당되었다.



즉 1591년 서인의 대표자인 정철(鄭澈)이 세자 책봉을 건의했다가 선조에 의해 축출된 후, 정철의 처벌에 대해 강경론을 주장하던 이발(李潑)·이산해(李山海)·정인홍(鄭仁弘) 중심의 북인과 온건론을 주장하던 우성전(禹性傳)·유성룡(柳成龍) 중심의 남인으로 분기하게 되었다.



이러한 분당 과정에서 북인은 조식(曺植)의 문인, 남인은 이황(李滉)의 문인이라는 학연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북인의 명칭은 분파의 중심 인물이었던 이발이 북악 밑에 살았고, 이산해가 한강 이북에 살았기 때문에 붙여졌다고 한다.



3. 변천



동인에서 분파된 북인은 임진왜란 중에 주전론(主戰論)을 펼친 명분을 바탕으로 연소한 신진들의 지지를 받아 전란 후 정국을 주도하였다. 하지만 전란 후유증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현실 정치에 대한 인식의 차이를 바탕으로 이이첨(李爾瞻)·정인홍 중심의 대북(大北)과 남이공(南以恭)·김신국(金藎國) 등의 소북(小北)으로 분기되었고, 다시 대북은 이산해 등의 골북(骨北)과 홍여순(洪汝諄)·이이첨 등의 육북(肉北)으로, 소북은 남이공 등의 청소북(淸小北:南黨)과 유영경(柳永慶) 중심의 탁소북(濁小北:柳黨) 등으로 분파가 계속되었다.



여기에는 서인과 남인에 비해 북인의 복잡한 학통도 한 원인이 되었다. 그후 몇 차례의 부침을 겪은 끝에 광해군이 즉위한 후 대북의 이이첨을 중심으로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고 임진왜란의 피해를 극복하는 데 많은 성과를 올렸다.



그러나 학통상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정인홍이 시도한 이언적(李彦迪)과 이황에 대한 배척이 실패로 돌아간 후, 선조의 적자(嫡子)이자 국왕의 동생인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살해하고 선조비인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축출하려는 정책을 펴면서 서인과 남인을 크게 배격하였다.



그것이 결국 자기 입지를 더욱 좁히는 결과를 가져와 무력을 동원한 서인의 광해군 축출, 이른바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정계에서 숙청되었다. 그후 북인은 인조대의 정치에 참여하였으나 붕당으로서의 의미는 소멸되었고, 일부 인물들은 남인과 행동을 함께 하였다. 효종·현종 때에도 북인의 잔존세력은 남인에 흡수되어 경종대 이후로 남인과 함께 정계에서 물러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