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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벌론


(  admin   2011년 02월 14일   )

일어나게 된 배경은 임진왜란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변변한 방어대책 없이 개전 초부터 일방적으로 몰린 조선은 명군(明軍)의 지원을 업고 평양성을 탈환한 이후에 반격의 실마리를 만들었다. 전쟁 기간에 명나라는 연인원 20만 이상의 병력과 은화 900만 냥 이상의 군사비를 지출하여 조선을 지원하였는데, 이를 바탕으로 난 이후의 조선에 대한 정치적 입김은 더욱 강화되었다.



동시에 조선에서는 명을 이른바 '재조(再造)의 은인(恩人)'으로 숭배하는 모화(慕華)의 분위기가 팽배해갔다.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은 전란의 후유증 극복에 힘쓰면서 외교적으로는 명과 신흥강국인 누르하치의 후금(後金) 사이에서 실리적이고 유연한 정책으로 또다른 전쟁을 피하는 데 애썼다.



화이관(華夷觀)에 기울어 있던 서인(西人)계 사대부는 광해군의 정책을 '패륜'으로 비판하고, 당시의 폐모론과 함께 광해군을 몰아내는 명분으로 삼았다.



인조반정 이후 집권한 서인세력은 처음에는 기미책을 통해 후금과 현상을 유지하는 정책을 취하였으나, 1636년 후금이 칭제건원하고 조선에 대해 명과의 국교단절과 신속(臣屬)을 요구하자 이를 거부하고 결국은 병자호란을 맞게 되었다.



국왕이 후금의 왕에게 치욕적인 항복의 예를 행하고, 소현세자·봉림대군 등이 볼모로 끌려간 상황은 조선 조야에 충격과 파문을 몰고 왔다. 북벌은 이러한 배경에서 인조의 뒤를 이어 즉위한 봉림대군(효종)에 의해 계획되었다. 그는 장차의 복수설치(復讐雪恥)를 위한 군비강화를 추진하여 훈련도감의 군액을 증대시키고 어영군과 금군(禁軍)을 정비 개편하였으며, 기마병의 확보에 주력하였다.



군비강화에 필요한 재원을 확보하기 위해 양반에게도 군포를 거두려 하였고, 노비 추쇄(推刷)를 엄격히 하였다. 또 친청파인 김자점 등을 제거하고 송시열·송준길·김집 등을 등용하여 북벌의 이념적 지주로 삼았다. 효종 자신의 북벌에 집념과 의지는 대단한 것이었으나, 당시의 상황은 그의 뜻대로 전개되지 않았다.



아직 두 차례의 전란이 남긴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한 형편이었고, 빈번히 발생한 수많은 자연재해는 재정궁핍을 불러 군비강화에 걸림돌이 되었다. 청은 이미 명의 잔여세력을 소탕하고 안정기에 접어들었으며 조선에 대한 감시가 매우 엄격하여, 그들의 눈을 피해 군비를 강화하는 데는 많은 한계가 있었다.



또 삼남일대에서는 도적의 발생이 날로 늘어나는 등 국내문제 역시 만만치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효종 말년에는 송시열 등도 군비확충에 반대하는 형편이었다. 결국 1659년 효종이 죽자 북벌론은 무산되었다.



한편 숙종 초에도 윤휴·허적 등 남인을 중심으로 북벌론이 다시제기되었다. 북벌을 담당할 기구로서 도체찰사부를 두고, 산성을 축조하고 무과 합격자를 늘리고 전차(戰車)를 제조하는 등 군비를 강화하였다. 이는 1674년 청에서 오삼계(吳三桂)의 난이 일어나 내부혼란이 발생한 것을 이용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청이 곧 안정을 되찾고 윤휴 일파가 1680년 실각함에 따라 실행에 옮겨지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