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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운


(  admin   2011년 02월 14일   )

각 지방에서 거둔 조세인 현물을 수도인 중앙으로 운송하던 제도이다. 달리 조전(漕轉)·조만(漕輓)·해조(海漕)라고도 한다. 강을 이용할 경우에는 수운(水運) 혹은 참운(站運), 바다를 이용할 경우에는 해운(海運)이라 하였다. 육로를 이용하기도 하였으나 도로와 운송수단의 문제로 크게 발달하지 못하였다. 조세로 거둔 쌀이나 곡물과 같은 현물을 수송하기 위해 강과 바다의 출발지와 도착지에 창고를 설치하고 일정 기간 저장하여 두었다가 중앙의 경창(京倉)으로 운송하였다. 이러한 조운제도가 기록으로 나타나는 것은 고려 때부터지만 신라가 통일한 이후부터 존재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고려시대는 지방관제가 정비된 성종 때인 992년(성종 11) 서남 연해지방과 한강 연변 등을 중심으로 60여 곳에 군현의 하부 행정기구인 포(浦)를 설치하면서 조운제도가 시작되었다. 이후 현종 때 충주·원주·나주·영광·영암 등 전국에 12 조창(漕倉)을 설치하였고, 이곳에 보관되어 있던 현물은 이듬해 2~5월 사이에 개경 교외의 동강(東江)과 서강(西江)으로 운송되었다. 조운 운송의 총 책임자는 중앙에서 파견된 판관(判官)이었고, 실무 행정을 담당한 사람들은 향리인 색전(色典), 운송에 직접 참여하는 사람들은 조창에 살고있는 백성들이었다.
  
조선시대에는 고려시대의 조운제도를 그대로 이어갔다. 그러나 왜구의 약탈로 인해 전기에는 서해안 예성강 어구에서 남해안 섬진강 어구까지 모두 9개의 조창을 설치하였다. 이 외의 것은 조선 후기 영조 때 추가로 설치되었다. 그리고 평안도지역과 함경도 및 제주도는 조세를 서울로 운송하지 않고 자체적으로 보관하였다가 군량미나 외국 사신의 접대비용으로 사용하도록 하였다(잉류지역).



해운의 경우 전라도의 세곡을 운반할 때 해운판관(海運判官)은 배의 손질과 세곡을 운송할 군사들을 점검하고, 관찰사는 차사원(差使員)을 정해서 백성에게서 거둔 세곡을 배에 나누어 싣고, 수군절도사는 세곡을 배에 실을 때 이를 감독하고, 우후(虞侯)는 세곡을 실은 배를 충청도까지 호송하고, 압령만호(押領萬戶)는 조를 짜서 직접 뱃길을 지휘하여 인솔하는 책임을 맡고 있었다. 이러한 업무 분담은 만일의 사고에 대하여 그 책임을 명확하게 하기 위한 조치였다.



수운의 경우 1395년(태조 4) 서울 용산에서 충주 금천(金遷)까지 한강 줄기 연안 7곳에 수로전운소(水路轉運所)를 설치하고 완호별감(完護別監)을 파견하였다. 수로전운소는 1414년(태종 14) 수참(水站)으로 그 명칭이 바뀌었는데 충주의 금천, 여주의 여강(驪江), 천령(川寧)의 이포(梨浦), 양근(楊根)의 사포(蛇浦), 광주의 광진(廣津), 그리고 한강도(漢江渡)와 용산진(龍山津) 등 7곳에 설치되었다. 서울의 한강나루와 용산나루 그리고 광나루 3곳을 제외하고는 남한강 유역에 4곳의 수참을 설치하였던 것이다.



조운을 위한 배는 크기에 따라 대·중·소로 나뉘어 있었다. 수운에서는 밑바닥이 좁고 길이가 길어 빠른 물살과 좁은 강폭에 잘 적응하도록 만들었으며, 해운에서는 밑바닥이 넓고 평평하며 길이는 짧아 깊은 물에서 보다 안정성을 갖추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큰 배는 쌀 250석, 중간 배는 200석, 작은 배는 130석의 양을 실을 수 있었다.



각지에서 거두어들인 조세는 서울의 경창인 군자창(軍資倉)·풍저창(豊儲倉)·광흥창(廣興倉)으로 운송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대동법이 실시되면서 운송 물량이 늘어나게 되었고, 이로 인해 관선(官船) 대신에 사선(私船)과 조창에 소속되지 않은 각 읍의 지방선인 지토선(地土船), 주교사에 소속된 주교선(舟橋船), 훈련도감에 소속된 훈국선(訓局船) 등 이용 가능한 모든 배들이 동원되었다.



조운제도로 인한 갖가지 폐단도 많았는대 배가 침몰하거나 지방 관리와 사공들의 결탁으로 인한 횡령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럴 때마다 백성들에게는 조세가 추가적으로 부과되었으며 실질적인 피해는 모두 백성들의 몫이었다. 이 제도는 조세의 금납화(金納化)가 이루어지면서 서서히 폐지되었다.   




[출처] 조운 [漕運 ] | 네이버 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