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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오사화


(  admin   2011년 02월 14일   )

사초(史草) 때문에 일어난 사화라고 하여 사화(史禍)라고도 한다. 사림파의 중앙진출을 보면, 세조 때 중앙집권·부국강병을 지나치게 추구하고, 훈구 대신들이 권력·재산을 모으자, 성종 때 김종직을 중심으로 한 사림파는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등장, 정계로 진출하였다. 3사(사간원.사헌부.홍문관)의 언론직 및 사관직(史官職)을 차지하면서 훈구 대신의 비행을 폭로·규탄하고, 연산군의 향락을 비판하면서 왕권의 전제화를 반대하였다.



한편 훈구파는 사림파를 야생귀족으로 보고, 사림이 붕당을 만들어 정치를 어지럽힌다고 비난하여 연산군 이후 그 대립이 표면화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종직과 유자광은 일찍이 개인감정이 있었고, 김종직의 제자 김일손이 성종 때 춘추관의 사관(史官)으로 있으면서 훈구파 이극돈의 비행과 세조의 찬탈을 사초(史草)에 기록한 일로 김일손과 이극돈 사이에도 반목이 생기게 되었다. 유자광·이극돈은 김종직 일파를 증오하여 보복에 착수하였다.



1498년 《성종실록》을 편찬하자, 실록청 당상관이 된 이극돈은, 김일손이 사초에 삽입한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이 세조가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빼앗은 일을 비방한 것이라 하고, 이를 문제삼아 선비를 싫어하는 연산군에게 고하였다. 연산군은 김일손 등을 심문하고 이와 같은 죄악은 김종직이 선동한 것이라 하여, 이미 죽은 김종직의 관을 파헤쳐 그 시체의 목을 베었다.



사림파 김일손·권오복·이목·허반·권경유 등은 선왕(先王)을 무록한 죄를 씌워 죽이고, 정여창·강겸·이수공·정승조·홍한·정희랑 등은 난을 고하지 않은 죄로, 김굉필·이종준·이주·박한주·임희재·강백진 등은 김종직의 제자로서 붕당을 이루어 조의제문의 삽입을 방조한 죄로 귀양보냈다.



한편, 이극돈·유순·윤효손·어세겸 등은 수사관(修史官)으로서 문제의 사초를 보고하지 않은 죄로 파면하였다. 이로써 사화 발단에 단서가 된 이극돈이 파면된 뒤 유자광은 그 위세가 더해진 반면, 많은 사림파 인사들이 희생되었다.




[출처] 무오사화 [戊午士禍 ] | 네이버 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