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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군


(  admin   2011년 02월 14일   )

육군에 종사하는 양인농민의
의무군역을 정병이라고 부른 것은 1459년(세조 5)의 병제개편 때부터였다. 이전까지는 서울에 번상 시위하는 군사를 시위패(侍衛牌), 각
지방에서 근무하는 군사를 영진군(營鎭軍) ·수성군(守城軍), 평안 ·함경도의 군사를 정군(正軍)이라고 불렀다. 1464년에는 다시 영진군과
수성군이 정병으로 합칭되었다. 이로써 양인농민의
의무군역이 여러 명칭으로 불리던 모순과 불편이 제거되었는데, 이와 같이 지방군을 정병으로 통칭할 수 있었던 것은 전국적으로 진관체제가
확립됨으로써 지방군제도가 통일성을 갖추었기 때문이었다.




 



정병은 조선시대 최대규모의 병종으로서 1475년(성종
6)의 기록에 의하면 정군(正軍:戶首)만 72,109명이었고, 그 봉족(奉足:保人)까지 합하면 대략 20만 명에 달하였다. 정병은 5위 가운데
충무위(忠武衛)에
편제되었고, 법정 근무일수를 채우고 거관(去官)하면 종5품의 영직을 받도록 되어 있었다. 지방에서 양인농민에게
정병군역을 부과하여 정군과 봉족으로 나누고, 정군을 기병과 보병으로 구분하는 것은 호적을 기초로 한 군적(軍籍)의
작성에 의해서였다. 군적의
작성은 지방향리와 더불어 이정(里正) ·권농관(勸農官) 등이 군적감고(軍籍監考)가
되어 그 실무를 담당하였다. 그러나 군적작성시
향리의 부정은 조선시대 전기간을 통하여 큰 폐단으로 지적되었다. 정병 중 궁궐을 시위(侍衛)하는 번상 기정병의 사회적 지위는 높은 편이었다.
이들은 부유한 양인농민
가운데에서 뽑혔고, 근무 중에는 도시(都試)에 응하여 갑사(甲士)나 무반으로 진출할 수 있었다.




 



그러나 16세기 지주제의 전개 속에서 확대되는 농지개간으로 인하여 연해지역이나 해도(海島)에 설치된 목장이 줄어들면서 말의 수가 감소하고,
마가(馬價)가 상승하였다. 이에 기병은 말을 소유하거나 빌려타기가 어렵게 되면서 보군화(步軍化)하였다. 임진왜란
이후에도 기병은 번상근무를 계속하다가 17세기 말 군포만 납부하면 실역(實役)을 면제해 주는 납포제가 인정되면서 납포군화(納布軍化)되었다. 번상
보정병은 15세기 후반부터 역졸화(役卒化)하였다. 16세기에 들어 증가하는 토목공사에서 보병은 요역에 의해 징발되는 연호군(煙戶軍)보다
우선적으로 동원되었고, 각사(各司)의 사후사령(伺候使令)으로도 지정되었다.




 



이에 따라 보병은 군장을 갖출 필요도 없었고 군사력으로 간주되지도 않았다. 그 후 보병들은 농업노동력의 확보, 가혹한 토목공사에의 기피,
서울의 물가고 등의 이유로 사람을 사서 대신 군역을 지게 하는 대립(代立)을 희망하였고, 정부 역시 기병과는 달리 보병은 대립해도 군사력에는 별
지장이 없다고 판단하여 대립을 허용하는 추세로 나아갔다. 한편 사적으로 수수되는 대립가(代立價)의 인상 속에서 보병들이 고통을 겪자 정부에서
대립가를 공식적으로 정하였으나 제대로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1538년(중종
33)에는 아예 대립가의 징수를 국가에서 관리하는 군적수포법(軍籍收布法)을
실시하여, 이후 보병은 직접 노동력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군포만을 납부하는 납포군(納布軍)이 되었다. 정병이 16개월에 2필씩 내던 군포세는
1751년(영조
27) 균역법(均役法)의
성립으로 1년에 1필로 감액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