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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


(  admin   2011년 02월 14일   )

조선 제6대왕. 1441∼1457(재위 1452∼1455). 향년 17세. 이름은 홍위(弘暐). 아버지는 문종(文宗), 어머니는 현덕왕후(顯德王后) 권씨, 비는 돈령부판사(敦寧府判事) 송현수(宋玹壽)의 딸인 정순왕후(定順王后) 송씨이다. 세종 30년(1448) 8세 때 왕세손에 책봉되었고, 1450년 문종이 즉위하자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1452년 5월 문종이 재위 2년 만에 죽자, 즉위하였으나 나이가 어려 정치하는 일에 어두우니 모든 조처는 의정부와 육조가 서로 의논하여 시행할 것과, 승정원은 왕명출납을 맡고 있으므로 신하들의 사삿일은 보고하지 말도록 교서를 내렸다. 문종의 고명을 받은 영의정 황보인(皇甫仁), 좌의정 남지(南智), 우의정 김종서(金宗瑞) 등이 측근에서 보좌하고, 집현전학사 출신인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하위지(河緯地)·신숙주(申叔舟) 등도 측근에서 보필하였다. 단종 1년(1453) 4월 경회루에 나가서 유생들을 친히 시험 보이고, 온성(穩城)과 함흥 두 고을에 성을 쌓았으며 나난(羅暖)·무산(茂山)의 두 성보(城堡)를 설치하였다. 이해 10월 수양대군(首陽大君)은 정권을 빼앗고자 자기 측근인 권람·한명회의 계책에 따라 안평대군(安平大君)을 추대하여, 종사를 위태롭게 하였다는 죄명으로 영의정 황보인, 좌의정 김종서, 병조판서 조극관(趙克寬), 이조판서 민신(閔伸) 등을 죽이고 정권을 잡았다. 일이 이렇게 되자, 어쩔 수 없이 수양대군을 영의정으로 삼고, 거사에 참가한 사람들에게 정난공신(靖難功臣)의 칭호를 주었다. 그리고 안평대군은 사사되었고, 그 아들 우직(友直)은 진도에 유배되었다. 1454년 정월 송현수(宋玹壽)의 딸을 왕비로 삼았으며, 이 달에 양성지(梁誠之)가 《황극치평도(皇極治平圖)》를 찬진(撰進)하고, 3월 춘추관에서 《세종실록》을 찬진하였다. 1455년 윤 6월 수양대군이 왕의 측근인 금성대군(錦城大君) 이하 여러 종친·신하들을 죄인으로 몰아 유배시켰다. 급박한 주변 정세에 단종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上王)이 되어 수강궁(壽康宮)으로 옮겼다. 세조 2년(1456) 6월 집현전학사 출신인 성삼문·박팽년 등과 성승(成勝)·유응부(兪應孚) 등에 의하여 상왕을 복위시키려는 사건이 일어났으나 계획이 실행되기도 전에 김질의 고발로 실패하였다. 이로 인하여 단종은 1457년 6월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어 강원도 영월(寧越)에 유배되었다. 이해 9월 경상도 순흥(順興)에 유배되었던 금성대군이 복위를 계획하다가 발각되어, 다시 노산군에서 서인으로 강봉되었다가 끈질기게 자살을 강요당하여 세조 3년(1457) 12월 24일에 영월에서 죽었다. 숙종 7년(1681) 노산대군으로 추봉되고, 1698년 복위되었다. 시호를 공의온문순정안장경순돈효대왕(恭懿溫文純定安莊景順敦孝大王)으로, 묘호를 단종으로 추증하고, 능호(陵號)를 장릉(莊陵)이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