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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후] 

김대중 납치 사건
권혁선  (2013년 11월 20일 17시02분07초)  


김대중은 1971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신민당 후보로 출마, 민주공화당 후보였던 박정희 현직 대통령에게 94만 표 차이로 석패했다. 박정희는 신승을 거두었지만, 민주주의 회복을 요구하는 김대중에게서 위기감을 느꼈다.
대선 직전 서울 동교동의 김대중 후보 자택에 폭탄이 배달되는 사건이 벌어졌으며, 대통령 선거 직후 열린 제8대 총선 과정에서는 지원유세에 나선 김대중이 탄 차량으로 14톤 대형트럭이 돌진하는 사건이 터진다. 김대중은 이 사고로 인해 골반 관절 부위에 부상을 당했다.
신변에 위협을 느낀 김대중은 교통사고 후유증과 지병의 치료차 일본으로 건너갔고, 1971년 11월, 국가 비상사태가 선포되고 이후 10월 유신이 선포되면서 일본으로 망명하는 길을 선택한다. 이후 일본과 미국을 중심으로 박정희 반대 투쟁과 민주화 운동을 진행했다.
 
박정희는 1972년에 10월 유신을 선포했다. 유신을 선포하기 전 박정희의 측근인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은 평양을 방문하여 김영주 조직지도부장과 회담을 가졌고, 그 답례로 박성철 제2부수상이 5월 29일부터 6월 1일까지 서울을 방문하여 이후락 부장과 회담을 가졌다. 그 결과 7월 4일에 조국통일 촉진을 위한 원칙에 대한 합의가 담긴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었다. 이 역사적인 회담 결과 한국에서는 이후락에 대한 평가가 급상승했고, 박정희의 후계자라는 설까지 나돌게 되었다.
그런데 수도경비단장인 윤필용이 이후락과의 대화 중 “대통령이 나이가 드셨으니 후계자를 골라야 한다”라고 발언한 것이 알려졌고, 격분한 박정희는 두 사람 및 관계자를 체포하여 수사할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측근이 반역자로 지목되는 상황은 박정희 정권에게 불리하기 때문에 이후락은 석방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후락은 박정희 대통령의 묵시적 승인 하에 박정희의 정적인 김대중을 납치할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김대중은 도쿄의 히비야 공원에서의 반(反)박정희 집회 참가를 앞두고 호텔 그랜드팰리스 2212호에 투숙하고 있었다. 1973년 8월 8일, 같은 호텔에 머물고 있던 양일동 한국민주통일당 대표의 초청을 받아 가진 회담을 끝내고 나오던 도중 누군가에게 습격을 당했고, 비어 있었던 2210호실에 감금되었다. 김대중은 이 방에서 마취약을 투여받아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오사카로 옮겨져 납치된 것으로 추정된다.
김대중은 나중에 “배를 탈 때 다리에 무게추를 달았다”라고 증언했다. 바다에 수장될 위험이 있는 상황에 처해 있을 때 동해 일본측 해안에서 해상자위대 함정이 추격해왔고, 사건이 발각될 것을 우려한 요원들은 계획을 변경하여 김대중을 부산까지 데려가서 풀어주었다. 김대중은 납치 사건 닷새 뒤, 서울의 자택 앞에서 발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