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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후] 

4차 개헌(3.15 부정선거 관련자 처벌 소급 입법 개헌)
권혁선  (2013년 10월 30일 11시03분31초)  


1960년 3·15부정선거 관련자 및 부정축재자들을 소급하여 처벌할 수 있도록 한 헌법개정.

소급입법개헌은 1960년 11월 29일 제4차 개헌에서 이루어졌으며 이 개정헌법에 따라 특별법이 제정되었고 또한 혁명재판소 및 혁명검찰부가 설치되어 혁명재판이 진행되었다.

그 내용은, 첫째 4·19혁명의 계기가 된 3·15부정선거 관련자 및 반민주행위자의 공민권 제한과 부정축재자의 처벌에 관한 소급입법권의 부여, 둘째 그와 같은 자를 다룰 수 있는 특별재판부 및 특별검찰부의 설치를 규정한 것이다.

민주당정권이 소급입법개헌을 만든 배경은, 허정(許政) 과도정부가 3·15부정선거 관련자 및 부정축재자들을 재판하는 과정에서, 반혁명분자들을 다룰 수 있는 <정부통령선거법>이 대통령직선제에서 내각책임제로 개헌된 6월 15일자로 폐지되어 면소판결론이 대두됨으로써 재판상의 혼선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그 과정은 다음과 같다. 4·19혁명과 4·25교수데모로 인한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의 하야성명을 계기로 4월 24일 정국 수습차 외무장관에 임명된 허정이 내각 수반이 되어 과도정부가 수립되었다.

과도정부는 3·15부정선거 관련자 처벌 발표와 동시에 관련자들을 붙잡아 구속하고 7월 5일 상오 10시부터 혁명재판이 진행되었다. 재판 분야는, ① 부정선거관리사건, ② 부정선거, ③ 부정선거지령사건, ④ 부정선거자금사건, ⑤ 정치깡패사건, ⑥ 발포명령사건, ⑦ 장부통령 저격사건, ⑧ 전성천(全聖天)선거법위반사건 등이었다.

전 내무장관 최인규(崔仁圭), 전 내무차관 이성우(李成雨), 전 치안국장 이강학(李康學), 전 자유당선거대책위원장 한희석(韓熙錫) 등에 대한 혁명재판(부장판사 정영조, 배석 유현석·석은만, 검사 김병리·오탁근)에서 사건별로 사형선고 혹은 구형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 재판진행중 법원 당국자들이 ‘반혁명분자들이 위반한 <정부통령선거법>은 대통령직선제가 내각책임제개헌이 통과된 6월 15일자로 폐지되었으므로 그들 반혁명분자들은 면소판결되어야 한다.’라고 해석함에 따라 재판이 혼란을 겪던 중 9월 22일 부정선거 관련자들의 심리가 일단락되고 혁명재판은 민주당정부로 넘어갔다.

혁명재판을 이관받은 민주당정부에서는 일괄처리하여 최고 사형에서 최하 3년까지 구형을 내렸다. 이에 대하여 일반국민은 ‘특별법’ 제정을 희망하였으나 정부와 국회에서 이 법 제정을 1심판결 후로 미루던 중 10월 8일 판결에서 오직 발포책임자인 전 시경국장만 사형이 선고되고 나머지는 증거불충분 이유로 무죄 또는 무죄에 가까운 경량을 선고받고 풀려나 도망쳐버렸다.

이에 격분한 4·19혁명 부상학생 50여 명이 국회의사당을 점거하고 ‘민주당정부 물러가라’고 외치는 가운데 소급입법개헌이 되고 12월 30일 특별법인 <민주반역자임시처리법>이 통과되어 1961년 1월 15일 특별재판소와 특별검찰부가 설치되었다. 이에 따라 10·8판결로 석방된 자들을 재검거하려 하였으나 장경근(張璟根)이 일본으로 도피하는 등 모두 도피해버렸다.

이 와중에서 민주당내 주도권 장악을 위한 신구양파간의 치열한 파쟁과 부정축재자로부터의 정치자금염출 및 각종 사회단체들의 연일 지속되는 데모로 5·16군사정변이 일어나 이들 특별법 관련자들은 군사정부에서 다루게 되었다.

소급입법개헌은 비록 5·16군사정변으로 소기의 목적을 이루지 못했으나 정치사적 면에서 볼 때 다시는 이 땅에서 부정선거·부정축재 및 사회악들이 일어나지 않도록 철퇴를 가하려 한 데 그 의의가 크다고 하겠다.

참고문헌

  • 『한국군사혁명사』(국가재건최고회의, 1963)
  • 『혁명재판공판기』(신태양사, 1960)

[네이버 지식백과] 소급입법개헌 [遡及立法改憲]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