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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정한론
권혁선  (2013년 10월 28일 17시01분27초)  


일본이 한국을 정복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일본에서 19세기 중반부터 대두되었다. 이미 1855년께부터 정한론을 정립한 일본은 1868년 1월 4일 명치유신으로 막부(幕府)시대를 종료하고 천황을 실질적인 통치자로 복권시켜 급속히 제국주의 국가가 되기 위한 위로부터의 개혁정책을 집행하였다.

일본은 명치유신 직후인 1868년 11월 대마도주를 통해 조선에 서계(書契: 외교문서라 할 수 있는 국가 간의 공식문서)를 보내왔다. 조선 정부는 ‘대일본(大日本)’, ‘황상(皇上)’ 등의 표현법 등 서계의 서식과 격식에 문제가 있다는 이유로 수리를 거부하였다.

천황제 통일국가를 수립한 일본은 대륙팽창 야욕을 드러내면서 1871년 9월 ‘청일수호조규’를 체결한 데 이어 조선을 넘보고 있었다. 1872년의 국민 징집령 등으로 많은 무사 계급들이 실직하게 되었는데, 이런 이른바 불평사족(不平士族)의 수가 60만 명에 달하였다. 사족은 한국의 양반에 해당하는 계급이지만, 양반은 문사족(文士族)인 반면 사족은 무사족(武士族)이라는 점에서 다르다.

김용구는 “이들의 처리 문제가 메이지 정부로서는 큰 과제가 아닐 수 없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 정한론이라는 명분이었다”며 정한론이 1873년 전후부터 크게 번성한 이유를 일본의 그런 내부 사정에서 찾았다.

1874년 11월 일본은 외무대승 모리야마 시게루를 부산에 보내 새로 작성한 서계를 올리면서 조선 정부에 국교 수립을 강력하게 요청했다. 그러나 조선 정부는 여전히 서계의 서식과 격식에 문제가 있음을 들어 일본의 요청에 응하지 않았다.

오늘날 일본의 우익 역사교과서는 “1873년 개국 권유를 거절한 조선의 태도가 무례하다고 하여 사족들 사이에 조선에 무력을 보내어 개국을 강박하자는 정한론이 대두하였다”고 쓰고 있다. 이에 대해 북한은 2001년 “이것은 참으로 도적이 매를 드는 격의 강도적 논리다”라고 반박하였다.

일본 동경학예대학 교수 기미지마 가즈히코는 우익의 『새 역사교과서』에 대해 “‘정한론’에 대해서는, 강화도사건과 조일수호조규 뒤에 기술하고 있고, 시대를 완전히 역전시켰다. ······ 여기서는 역사의 상호관련성을 인식할 수 없다. 정한론을 ‘사족들의 불만’과 사이코 다카모리와 오쿠보 도시미치라는 메이지의 정치가를 영웅시하는 시점에서만 서술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독립기념관장 김삼웅은 “일제가 한국침략과 지배를 정당화하고자 관학자들을 동원해 만든 각종 식민지 용어가 곳곳에 쓰이고 있다”며 ‘정한론’은 ‘일제침략론’으로 고쳐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참고문헌

  • 신용하, 「신용하 교수가 보는 ‘갑신정변’/ 개혁풍운아 김옥균: 15·끝」, 『한국일보』, 1994년 3월 2일, 11면
  • 김태웅, 『뿌리깊은 한국사 샘이깊은 이야기 6: 근대』, 솔, 2003, 29·34쪽
  • 김용구, 『세계관 충돌과 한말 외교사, 1866~1882』, 문학과지성사, 2001, 187쪽
  • 이광린, 『한국사강좌 V (근대편)』, 일조각, 1997, 57쪽
  • 윤학준, 『양반 동네 소동기』, 효리, 2000, 146쪽
  • 「북한의 목소리」, 이원순·정재정 편저, 『일본 역사교과서, 무엇이 문제인가: 올바른 역사 인식을 위한 비판과 제언』, 동방미디어, 2002, 193~209쪽
  • 기미지마 가즈히코, 「일본의 새로운 민족주의적 교과서의 성격」, 이원순·정재정 편저, 『일본 역사교과서, 무엇이 문제인가: 올바른 역사 인식을 위한 비판과 제언』, 동방미디어, 2002, 47~70쪽
  • 도재기, 「일제식민용어 법조·학계서도 아직 사용」, 『경향신문』, 2005년 4월 27일,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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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지식백과] 정한론 [征韓論] (선샤인 지식노트, 2008.4.25, 인물과사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