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림이의 역사 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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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훈련대와 시위대 문제
권혁선  (2013년 10월 28일 14시29분39초)  


1895년(고종 32) 제2차 갑오개혁 때 일본의 건의와 지휘 하에 창설된 군대. 

그해 1월 17일 주한 일본공사 이노우에[井上馨]가 근위병을 설치할 것을 고종에게 제기했다. 그리하여 2월 12일 구친군사영(舊親軍四營)에서 장정을 뽑아 1개 대대 규모의 훈련대를 설치하고, 훈련대장으로 참령(參領) 신태휴(申泰休)를 임명했으며, 교관으로 일본군을 두었다. 이어 곧 서울에 제2대대를 설치하고, 4월 평양에 3대대를 설치했다. 청주·전주 등에 제4·5·6대대를 설치하기로 계획했으나, 경비문제 등으로 연기되었다.

그해 5월 칙령 제91호로 훈련대사관양성소를 설치하여 소장에 참령 유돈수(柳敦秀)를 임명하고 일본인을 교관으로 초빙했다. 이어 7월 제1·2대대로 연대를 편성하고 연대장에 부령(副領) 홍계훈(洪啓薰)을 임명했다. 당시 일본의 독단적인 내정개혁에 불만을 품고 있던 민비세력이 친일세력의 영향력을 배제하면서 러시아 및 친러세력를 끌어들이자, 박정양(朴定陽)·박영효(朴泳孝) 등 친일세력은 고종의 호위를 일본의 영향력 하에 있던 훈련대에 맡겨 러시아와의 접근을 저지하려 했다. 그러나 러시아 공사 베베르는 미국 공사 실과 함께 일본의 계획을 저지하고 박영효를 민비살해음모로 몰아 추방했다.

정부 내의 친일세력이 제거되자, 7월말 정부는 일본의 영향 하에 있는 훈련대를 해산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에 새 일본공사 미우라[三浦梧樓]는 친러세력의 보루인 민비를 제거하기 위해 8월 20일 일본 수비대원과 폭력배, 일부 훈련대원들을 궁중에 난입시켜 민비를 학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켰다.

 을미사변 직후 미우라 등은 학살사실을 은폐하고 흥선대원군을 앞세운 친일내각을 세웠다. 8월 22일 친일내각은 시위대를 폐지하여 이를 훈련대에 편입시켰으며, 25일 확대된 훈련 제1연대를 연대본부와 제1·2대대로 편성하고 대대는 대대본부와 4개 중대로 편성했다. 연대 총원은 병졸 1,600명과 장교 173명이었다.

그러나 민비학살의 실상이 알려지고 국내외적으로 일본에 대한 비난이 거세지자, 미우라 등은 일본으로 철수해버렸고 친일세력도 다시 정부 내에서 배제되었다. 그리하여 훈련대는 9월 13일 김홍집 내각의 칙령 제169호에 의해 폐지되었다. 대신 ‘육군편제강령’이 반포되어 육군을 친위군(親衛軍)과 진위군(鎭衛軍)으로 재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