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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백동화
권혁선  (2013년 10월 27일 20시20분10초)  


개항 이후 급증하는 재정 수요와 당면한 재정 궁핍에서 벗어나기 위해 1892년부터 1904년까지 주조·유통시켰다. 전환국에서 만들었는데 2전5푼의 액면으로, 표면 상단에는 오얏꽃무늬〔李花章〕, 우측에는 오얏나뭇가지〔李枝〕, 좌측에는 무궁화 무늬가 있다.

1894년의 「신식화폐발행장정」에 의한 은본위제 시행과 1901년의 「화폐조례」에 의한 금본위제(金本位制) 채택에 의해 보조 화폐로 계속 사용되었다.

1892년부터 1904년까지 발행한 총 화폐 1,890여 만 환 중 백동화는 1,670여 만 환으로, 발행 총액의 약 88%를 차지했다. 그런데 당시 시중에 유통된 백동화에는 전환국에서 주조한 것 이외에도 민간이나 외국인에 의한 위조(僞造), 또는 외국에서 밀수입된 것도 상당액 포함되어 있었다.

백동화의 위조 행위는 크게 특주(特鑄)·묵주(默鑄)·사주(私鑄)로 구분되었다. 특주는 왕이 직접 대신이나 일부 관리를 통해 특정인에게 이의 주조권을 인정해 주는 것으로 규모가 가장 컸다.

묵주란 전환국에서 극인(極印)을 훔쳐 위조하는 것으로, 당국자에게 뇌물을 주고 묵인케 하는 방법을 썼다. 사주는 순전한 위조 행위로서 몰래 숨어 주조한 뒤 유통시켰다.

위조 행위에는 우리나라 사람 이외에도 일본·청·영국·독일 사람들까지 가담했고, 위조된 금액은 1905년 1000여 만 환에 달해 서울의 위조화폐 유통액은 진짜 돈의 20∼30%, 평양은 80%를 차지할 정도였다. 남주(濫鑄)와 위조, 외국으로부터의 밀수입은 국내 통화량을 더욱 증가시켜 화폐 가치를 급속도로 떨어뜨렸다. 더욱이 경기도를 중심으로 한 인근 지역에서만 유통되어 가치 폭락은 걷잡을 수 없었다.

이렇게 되자 국내 화폐를 가진 자는 그 가치가 더 떨어지기 전에 상품이나 상대적으로 안정된 외국 화폐와 교환하려 했다.

궁내부(宮內府)에서는 일본 화폐를 대량 매입했으며, 탁지부(度支部)에서는 세금까지도 일본 화폐로만 받으려고 하였다. 일본 화폐 100엔과의 교환비는 1899년 116환, 1900년 127환, 1901년 140환, 1902년 178환, 1903년 188환, 1904년 198환, 1905년 211환이었다.

이처럼 백동화의 가치가 계속 떨어지면서 국가 재정이 파탄나고 민중의 생활이 어렵게 되자 화폐제도를 개혁하자는 요구가 불같이 일어났다.

그러나 왕실 재정 수입의 중요한 원천이 되고 일시적이나마 재정 수입에 도움이 되는 한 전면적인 검토나 개혁은 쉽게 이루어질 수 없었다. 1904년 전환국의 폐지로 이의 주조도 금지되었다.

참고문헌

  • 『고종실록(高宗實錄)』
  • 『대한계년사(大韓季年史)』
  • 「근대한국화폐(近代韓國貨幣) 및 전환국의(典?局) 연혁(沿革)」(申賀宣政, 이석륜 역, 『한국경제사문헌자료』 6, 1975)
  • 「전환국고(典?局考)」(원유한, 『역사학보(歷史學報)』 37, 1968)
  • 『황성신문(皇城新聞)』
  • 『仁川府史』(仁川府廳, 1933)

[네이버 지식백과] 백동화 [白銅貨]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