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위원부(歐美委員部)

( admin   2011년 01월 25일   )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약칭 임정)가 대미외교업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미국의 워싱턴에 설치한 외교담당기관. 중국 상하이에서 수립된 임정은 조국광복을 위하여 독립군에 의한 무력항쟁을 하는 한편, 세계 열강에 대한 외교활동을 전개하여, 국제여론을 한국에 유리하도록 조성하려 하였다.


임정에서는 전부터 미국의 필라델피아에 외교통신부를 설치하여 외교활동을 하는 서재필을 외교전권특사로 임명하여 임정의 공식대표로 일하게 하였다.


그런데 이와는 별도로 이승만도 워싱턴에 사무실을 설치하고 외교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1919년 9월 이승만이 임정의 대통령으로 선임되자, 그의 사무실에 구미위원부를 설치하고 서재필의 외교통신부와 프랑스의 파리에서 대(對)유럽외교활동을 하던 파리 주재 위원부를 모두 구미위원부에 통합하였다.


미국인 변호사 F.A.돌프를 고문으로 채용하고 파리 주재 위원부에서 활동하던 김규식을 미국으로 불러 구미위원부 사무를 주관하도록 하였으며, 이대위·임병직 등이 김규식을 돕도록 하였다.


또 미국인 변호사 J.W.스테이커, INS 통신사 기자 J.J.윌리엄스 등도 이 외교활동에 참가하게 하였다. 이승만·서재필·김규식 등은 주로 미국 국무성을 상대로 외교활동을 전개하였는데, 임정이 하나의 정부로서 미국 정부의 공식승인을 얻지 못하였기 때문에 여러 어려움이 많았다.


구미위원부는 《한국평론:Korea Review》이라는 영문월간지를 발행하였으며, 《어린이 순난자》 《대한정신》 등의 단행본도 발간하여 일본의 한국침략과 한국의 입장을 미국사회에 호소하였다.


이상과 같은 구미위원부의 활동으로 한국문제가 미국 의회에 상정되게 되었는데, 상원에서 3회, 하원에서 1회 토의되었으며, 상원의원 18명, 하원의원 3명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발언하였다.


특히 토머스는 미국이 한국의 국권피탈을 은근히 도와준 점을 맹렬히 비난하였다. 그러나 외교위원회에서의 표결에서는 34대 46으로 결국 한국을 국제연맹 회원으로 인정하자는 토머스의 제안이 부결되었다.


비록 부결이 되기는 하였으나 한국문제는 미국의회의 관심사가 되었으며, 또 상당수의 의원이 한국을 동정하고 있다는 점에 용기를 얻어 구미위원부는 방향을 바꾸어 이번에는 민간외교를 전개하였다.


이승만 등은 미국의 종교계·교육계 인사들과 접촉하여 일본이 한국 내에서 자행한 그리스도교도에 대한 탄압과 학살의 진상을 폭로하였다. 1921년 11월 워싱턴에서 세계평화를 위한 군비축소문제와 태평양 연안 및 아시아 제국(諸國)에 대한 정책을 논의하기 위하여 워싱턴군축회의가 개최되었는데, 구미위원부는 이를 호기로 삼아 외교활동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먼저 군비축소회의 한국특파단을 구성하여 단장 이승만, 부단장 서재필, 서기 정한경, 특별고문 C.토머스 등으로 부서를 정하였다. 이들은 한국의 독립이 세계평화유지에 불가결한 관건이 된다고 역설하였으며, 한국대표단의 회의참석을 요구하였다.


한국대표단은 12월 28일 한국 내의 13도 대표와 각 사회단체 대표 37명이 서명한 ‘한국인민치태평양회의서를 회의에 제출하였으며, 임정의 요구서도 정식으로 접수시켰다.


그러나 열강으로 자리를 굳힌 일본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미국을 비롯한 여러 회의 참가국은 한국의 입장을 옹호해 주지 않았으므로, 이 회의에서도 별다른 외교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한편 출범 초부터 이승만 개인기관으로 활용되거나 임시정부에 보내지는 애국금을 전용하는 등 문제를 일으켜 1925년 임시정부는 폐지령을 내렸으나 이승만은 이를 묵살, 1928년 재정난으로 해체될 때까지 유지시켰다.


1934년 임정에서는 다시 이승만을 새로 설치한 주미외교행서의 위원으로 임명하여 대미외교를 담당하게 하였다.


1941년 임정은 주미외교행서를 주미외교위원부로 개편하는 동시에 이승만을 그 위원장에 임명하였다. 주미외교위원부는 당시 미국에 조직되어 있던 한족총연합회·한미협회 등과 협력하여 미국정부를 상대로 한 외교활동을 하였다. 1942년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이후에는 미국·영국·중공·소련 등의 연합국정부에 대하여 임정의 승인, 따라서 한국을 연합국의 일원으로 인정해 주기를 계속해서 요구하였다.


1944년 임정은 주미외교위원부를 주미외교위원회로 개칭하고, 위원장 이승만, 부위원장 김원용, 비서 정한경, 위원 정기원·한시대·김호·이살음·변준호·안원규·송헌주 등을 임명하였다.


1945년 4월 샌프란시스코에서 57개국 대표들이 모여 전후의 세계평화를 논의할 때, 주미외교위원회는 그 회의에의 참가를 강력하게 요구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