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하이 사변

( admin   2011년 01월 25일   )

중국과 일본 사이의 제1·2차에 걸친 국지전쟁.

〔제1차〕 만주사변 때 일어난 중국과 일본 사이의 국지전쟁. 세계의 이목을 <만주국> 설립공작에서 딴 데로 돌리고 중국의 항일운동을 억압하기 위한 모략공작에서 발단되었다. 일본참모본부의 소좌 다나카 류키치 등은 관동군참모장 이카가키 세이시로 등의 의뢰로 중국인을 매수한 뒤, 1932년 1월 일본인 승려를 습격하여 살해하고 항일운동의 중심지인 상하이에 불안한 정세를 조성하였다.


이 사건은 중국측이 일본의 항의요구를 받아들여 일단락되었으나, 일본해군은 일본 조계에 육전대를 상륙시켜 배치하고 29일 중국군과 충돌하였다.


중국측의 제19로군은 항일의식이 높은 정병을 투입하고 상하이 시가지와 북서쪽 교외의 수륙 지형지물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일본 육전대를 괴롭혔으며, 2월에는 일본정부가 육군 3개사단을 동원하여 격전을 전개하였다. 상하이는 각국의 권익이 엇갈리는 곳이었으므로 미국·영국·프랑스 3개국의 권고 등 국제적 압력이 가해진 결과, 국제연맹의 개입을 두려워한 일본은 3월 3일 전투를 중지하고, 5월 정전협정이 맺어져 철수하였다.


이 사이 3월에 <만주국>이 발족하여 일단 일본의 모략 의도는 성공하였으나, 중국의 항일의식과 열강의 대일경계심을 일거에 증대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또 정전교섭중인 4월 29일 한국의 독립투사 윤봉길의 폭탄투척으로 대장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와 공사 시게미쓰 마모루〔重光葬〕가 부상(뒤에 시라카와 요시노리는 사망)하는 등 내외에 큰 파문을 던졌다.
 

〔제2차〕 루거우차오사건에 이어 중·일전쟁의 도화선이 된 전투. 화베이〔華北〕에서의 전투가 중국군의 저항으로 교착상태에 있었던 1937년 8월 일본은 해군 오야마 이사오 등이 사살된 사건을 구실로 상하이의 중국군을 공격하고 추가로 육군 2개 사단을 파견하여 전면적인 전쟁을 전개하였다. 그 뒤 중국 국민정부도 대일전쟁에 나섬으로써 8년이라는 장기간에 걸친 중·일전쟁으로 발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