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0만세운동

( admin   2011년 01월 25일   )

1926년 6월 10일 조선의 마지막 임금 순종의 인산일(因山日)을 기하여 일어난 독립운동. 병인만세사건(丙寅萬歲事件)이라고도 한다.

6·10만세운동은 권오설(權五卨)을 중심으로 한 노총계(勞總系), 이병립(李炳立) 등을 중심으로 한 사직동계(社稷洞系), 박용규(朴龍圭)를 중심으로 한 통동계(通洞系) 등 3계열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6·10만세운동은 이전의 분산적·비조직적 성격에서 벗어나 학생층 전체가 참여한 계획적·조직적 항일운동으로 나타났다.
순종이 죽자 일제는 3·1운동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하여 칠저한 경계태세를 갖추었고, 서울에는 7000여 명의 육·해군을 집결시켰으며, 부산·인천에는 함대를 정박시켰다.
노총계에 의한 운동은 사회주의계열의 권오설·김단야(金丹冶)·이지탁(李智鐸), 인쇄직공 민창식(閔昌植)·이용재(李用宰) 등에 의하여 추진되었으나 중국지폐위조사건·개벽지압수사건 등으로 사전에 발각, 관계자들이 체포됨으로써 실패하였다. 사직동계에 의한 것은 연희전문의 이병립과 박하균(朴河均), 경성대학의 이천진(李天鎭) 등이 중심이 되었다.
이들은 조선학생과학연구회의 춘계야유회 때 순종 승하 소식을 듣고 거사를 계획하였다. 이병립·이병호(李炳鎬) 등이 준비책임, 박하균·박두종(朴斗鍾)이 자금을 맡았다. 이들은 일제의 감시가 기성 독립운동가들에게 집중되어 있는 틈을 타 태극기와 격문을 만들어 학생들에게 배포하였다.
통동계는 중등학교 학생들이 중심이 되었다. 중앙고등보통학교·중동학교의 박용규·곽대형(郭戴炯)·이광호(李光鎬) 등이 사립고보생 중심의 시위를 결의하고 격문을 만들어 학생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6월 10일 순종의 인산에 참가한 학생은 2만 4000여 명이었다. 인산행렬이 단성사 앞을 지날 때 이선호(李先鎬)와 중앙고등보통학교 학생 300여 명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1000여 장의 격문을 살포하였으며, 을지로·종로3가·동대문·청량리 등에서 학생들은 교육·토지제도의 개혁, 일본제국주의 타도, 8시간노동제채택 등을 외치며 시위를 하였다.
군중의 호응으로 시위가 확대되었으나 조직 사이의 유대 결여와 민족진영의 조직약화, 노총계 사회주의계열의 사전체포 등으로 일본경찰에 저지당하여 6·10만세운동은 실패하였다.
이때 체포된 학생은 1000여 명이었는데, 시위가 가라앉자 주동자 11명을 제외하고 모두 석방되었다. 11명에게는 27년 열린 고등법원 재판에서 징역 1년과 집행유예가 선고되었다. 6·10만세운동은 서울에서만 일어났으나 그 여파로 전국 각지에서 학생들의 동맹휴학이 일어났으며, 항일투쟁의식이 고조되었다. 또한 27년 신간회(新幹會)·근우회(槿友會)·신정회 등의 조직과 29년 광주학생운동에도 영향을 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