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휘

( admin   2011년 01월 25일   )

1873∼1935. 향년 63세. 독립운동가. 호는 성재(誠齋). 함경남도 단천(端川) 출생. 구한국군 무관학교 졸업 후 육군참령(參領)을 지냈고, 고종 29년(1902) 이준(李儁)·민영환(閔泳煥) 등과 개혁당을 조직하여 개화운동을 시작하였다. 순종 1년(1907) 군대해산의 기밀을 탐지하고 강화진위대의 연기우(延基羽)·김동수(金東壽) 등 군대 동지들과 강화도(江華島) 전등사(傳燈寺)에서 협의, 의병을 일으키기로 했으나, 연기우의 체포로 실패하자 이동녕(李東寧)·안창호(安昌浩) 등과 신민회를 조직하여 개화운동과 항일투쟁을 벌였다. 또한, 문화교육조직인 독립협회의 지지자로 활동하면서 외국 식민지주의자들의 축출과 조선의 정치적 독립을 위한 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는 무관 출신이었으나 교육문화사업에도 관심을 가져 강화도의 합일학교(合一學校)를 비롯해 개성(開城)·평양(平壤)·원산(元山) 등지에도 여러 학교를 설립하였다. 또한 민족계몽을 위한 단체로서 한북흥학회(漢北興學會)를 조직하였으며, 1908년에는 서우학회(西友學會)와 통합해 서북학회로 발전시켰다. 1912년 중국 만주(滿洲)로 망명하여 반일적 성격의 간민회에 가담하였고, 1915년에는 노령(露領)에서 한인사회당을 조직하였다. 1919년에는 상하이〔上海〕로 가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조직에 참여하여 군무총장을 거쳐 1920년에는 국무총리를 지냈다. 그러나 한인사회당을 고려공산당으로 개칭하는 등 공산주의 의식을 갖고 있던 그는 모스크바의 V.I.레닌으로부터 받은 독립운동자금 중 일부를 고려공산당 조직기금으로 유용한 것이 임시정부에 발각되어 사임하였다. 그 뒤 1927년 일본이 국내 공산주의자들을 검거하자 이들을 돕기 위해 국제혁명자후원회에 참여하였고, 1927∼1929년에는 블라디보스토크 국제혁명자후원회 책임자로 활동하였다. 시베리아에서 병사하였다. 1995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일설에는 생몰년을 1873∼1928이라고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