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재산 600억' 조국 독립에 바친 '우당 이회영'

( admin   2011년 01월 13일   )

‘<오성과 한음> 오성 이항복의 후손’
‘명동성당 일대의 땅을 대부분 소유한 거부’
‘여섯 명의 정승과 두 명의 대제학을 배출한 명문가’

어마어마한 재산, 높은 신분, 명망 있는 집안.

여기 이 모든 것을 버리고 차가운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향하는 한 가족이 있습니다. 우당 이회영 일가입니다.

1910년 경술 국치, 나라를 잃은 이회영과 그 형제들은 가문의 모든 재산을 조국 독립을 위해 쓰기로 결심합니다. 일본 정부의 회유에도 모든 것을 버리고 낯선 땅 만주로 떠난 것입니다. 처분한 재산은 40만 원. 지금 기준 600억 원의 돈입니다. 급하게 처분하느라 제 값을 받지 못한 것까지 계산하면 대략 2조 원에 달합니다. 그 전 재산을 들여 만주에 세운 학교. ‘신흥무관학교’ 그곳에서 길러낸 3500명의 독립군은 척박한 만주 땅에 자리 잡은 독립투쟁의 뿌리가 되었습니다. 이 학교의 학비와 식비는 전액 무료.

더 많은 독립군들을 길러내고 그들의 부담을 줄이기 위한 이회영 선생의 마음이었습니다. 그 결과 이회영 선생과 그의 가족들은 극심한 가난한 시달렸습니다. 하루에 죽 한 끼조차 먹기 힘들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견뎌야 했던 건 가난만이 아니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들까지 잃어야 했습니다. 그의 형제 중 4명이 항일 운동 중 사망했습니다.

그럼에도 그가 주저앉을 없었던 이유. ‘대한 독립’

이회영 선생은 어떤 시련에도 독립운동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1932년, 그가 66살이 되던 해. 밀고자에 의해 일본 경찰에게 잡힌 이회영 선생은 모진 고문 끝에 광복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아야 했습니다.

출처 : SBS 뉴스



원본 링크 : http://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3121898&plink=ORI&cooper=NAVER&plink=COPYPASTE&cooper=SBSNEWSEND



신민회(新民會) 중앙위원으로 교육사업에 힘쓰다가 만주로 망명하여 해외항일투쟁을 계속했으며, 1920년대 이후에는 무정부주의 운동에 투신했다.

본관은 경주(慶州). 호는 우당(友堂). 아버지는 판서 유승(裕承)이다. 족친인 이상설(李相卨)과 절친했고 여준(呂準)·이강연(李康演)·남궁억(南宮檍)·이상재(李商在) 등과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접촉했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이듬해 안창호(安昌浩)·이갑(李甲)·전덕기(全德基)·양기탁(梁起鐸)·안태국(安泰國)·이동녕(李東寧)·이동휘(李東輝)·신채호(申采浩) 등과 함께 비밀결사 신민회를 조직하고 중앙위원으로 활약하는 한편, 만주에 민족해방운동의 근거지를 마련할 것을 협의하여 간도 용정촌(龍井村)에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설립하고 이상설을 책임자로 삼아 동지획득과 교포교육에 주력하게 했다.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해 을사조약 체결의 강압성을 폭로하려는 계획을 세워 고종에게 건의하고, 이상설이 특사로 파견되자 서전서숙의 경영을 위해 여준을 만주로 파견했다.

1908년 이상설과 운동방책을 협의하여 이상설은 국외에서 활동하고 국내활동은 자신이 담당하기로 했다. 그는 교육진흥운동이 무엇보다 시급하다고 판단, 동지들을 평양 대성학교, 안동 협동학교, 정주 오산학교 등 각 학교에 파견하고, 자신도 상동청년학원(尙洞靑年學院)의 학감으로 취임, 교육사업에 힘을 쏟았다.

1909년 양기탁의 집에서 김구(金九)·이동녕·주진수(朱鎭洙)·안태국·이승훈(李昇薰)·김도희(金道熙) 등과 신민회 간부회의를 소집하여 만주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할 것을 결의하고, 류허 현[柳河縣] 싼위안푸[三源堡] 추가가(鄒家街)를 후보지로 결정했다.

같은 해 겨울 전가족이 만주로 건너가 이상룡(李相龍)·김동삼(金東三) 등과 황무지를 개간하며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매진했다. 1911년 최초의 재만한인 자치기관인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고, 1912년에는 퉁화 현[通化縣] 합니하반(哈泥河畔)으로 옮겨 경학사를 모체로 신흥강습소를 설립하여 독립군 지도자를 양성했다.

이해 흉작으로 경학사를 해산하고 국내로 들어와 독립군기지 건설을 위한 군자금 모집에 진력했다. 1918년 미국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제창에 자극되어 국내외에서 독립기운이 활발해지자 오세창(吳世昌)·한용운(韓龍雲)·이상재 등과 밀의한 뒤 고종의 국외망명을 계획, 시종(侍從) 이교영(李喬永)을 통해 고종에게 승락을 얻었으나 고종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실패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상하이[上海]의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고 임시의정원의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했다. 그는 정부와 독립운동의 본부는 본질적으로 달라야 된다고 주장했으나 반영되지 않자 상하이를 떠나 베이징[北京]에 체류했다.

이때부터 민족주의에서 점차 무정부주의로 선회하기 시작, 이을규(李乙奎)·이정규(李丁奎)·조소앙(趙素昻)·신채호·김창숙(金昌淑) 등과 자주 접촉했고, 독립 뒤에 건설될 사회는 국가간 민족자결의 원칙뿐만 아니라 민족 내부에서도 자유와 평등의 원칙이 그대로 실현되는 사회여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러 이를 위한 사회개혁의 원리로서 무정부주의운동에 투신했다.

1923년 중국 후난 성[湖南省] 한수이 현[漢水縣]에서 한중합작 이상농촌인 양도촌(洋濤村) 건설에 힘썼다. 1924년 4월에는 유자명(柳子明)·이을규·이정규·정현섭(鄭賢燮)·백정기(白貞基) 등과 함께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조직하고 〈정의공보 正義公報〉를 간행했다.

1928년 7월 아시아 각국의 무정부주의자들이 모여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을 결성하자 이 대회에 〈한국의 독립운동과 무정부주의운동〉이라는 메시지를 보내 한국 독립운동을 적극 지원해줄 것을 호소했다.

1931년 정해리(鄭海理)·김광주(金光州)·원심창(元心昌)·박기성(朴基成)·이용준(李容俊)·유산방(劉山芳) 등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과 관련을 맺고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같은 해 9월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상하이에서 항일구국연맹을 조직, 의장에 추대되어 행동강령으로 일본군기관 및 수송기관 파괴, 일본요인 및 친일파 숙청, 일본외교기관 폭파 등을 결정했다.

1932년 상해사변이 일어나자 중국국민당과 교섭하여 자금과 무기지원을 확약받았다. 같은 해 11월 만주의 연락근거지 확보와 지하공작망 조직, 주만 일본군사령관 암살 등을 목적으로 다롄[大連]으로 가던 도중 밀정 연충렬과 이규서의 밀고로 다롄의 일본경찰에 잡혀 고문 끝에 옥사했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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