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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대] 발해 문왕의 고려 국왕 문서
 권혁선  2015.04.05, 조회 :1720 

앨범 표지

발해 문왕 당시 일본과의 외교

일본 헤이안시대의 궁성인 헤이조궁 터에서는 두 점의 목간이 발견되었다. 시대가 앞선 목간에는 발해사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그런데 758년에 만든 목간에는 견고려사라고 씌어있다. 발해는 758년 9월 양승경을 대표로 한 사신단을 일본에 보냈다. 이때 국서에 고려국왕(高麗國王)이라고 표현했다. 그러자 일본에서도 문왕을 고려왕이라고 표현하고 국서를 보내왔다.

일본은 778년에 사신을 보낼 때에도 송(送)고려객사라고 하여, 발해를 고려라고 불렀다. 또 일본의 왕실창고인 정창원에 소장된 악구궐실병출납장이란 문서에는 762년 일본에 사신을 갔다가 다음에 돌아온 왕신복 일행이 763년 1월 동대사를 방문한 흔적을 보인다. 이 문서에는 고려객인이라고 표현되어 있다.

문왕은 단순히 나라 이름만 고려라고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은 고구려 역대 임금이 그러했던 것처럼 천손(天孫)이라고 했다. 771년 문왕은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 자신을 천손으로 표시하고, 일본과의 관계를 장인과 사위라고 하였다. 그러자 일본에서 이를 항의하기도 했다. 천손이란 의미는 곧 천하의 주인 즉, 제국의 지배자인 천자(天子)라는 뜻이다. 발해가 일본을 화나게 할 정도로 낮추어 보는 문서를 보낸 것은, 발해의 국력이 강해졌다는 자신감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727년부터 759년까지 5차례 일본에 보낸 사신은 모두 무관을 대표로 보냈다. 그런데 762년 이후로는 문관으로 바뀐다. 이것은 일본과의 교섭이 신라를 견제하려는 군사적인 목적보다, 경제적인 목적으로 전환했음을 말해준다. 760년을 전후해서 발해와 일본은 연합해서 신라를 침공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일본은 이 계획에 적극적이었지만, 발해는 이 계획에 최종적으로 반대해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